우산이 되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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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종호/수필가

시기적으로는 장마철이나 번지수를 잘못 찾은 먹구름으로 인해 연일 땡볕이다. 푹푹 찌는 ‘가마솥더위’라는 비유가 딱 들어맞는다. 아마도 라니냐와 지구온난화의 영향이리라. 그렇게 며칠째 폭염주의보와 열대야가 이어지더니 드디어 새벽부터 비가 내린다.

 

그런데 호우(豪雨)에 버금가는 제법 세찬 기세다. 금세 마당에 빗물이 고인다. 도시인들에게는 그다지 달갑지 않을 터이나, 타들어가던 농심을 흡족히 달래줄 단비임이 분명하다.

 

툇마루에 앉아 물 탄 미숫가루를 먹으며, 퐁퐁 방울져 마당을 흐르는 빗물을 바라보던 유년의 기억을 반추하는 입가에 미소가 번진다. 멋쩍게 동요를 흥얼거려 본다. “이슬비 내리는 이른 아침에/우산 셋이 나란히 걸어갑니다/파란 우산 검정 우산 찢어진 우산/좁다란 학교 길에 우산 세 개가/이마를 마주대고 걸어갑니다”

아무렴. 우산은 간편하면서도 요긴한 물건이라 하겠다. 무작정 길을 나섰다가 예고 없이 갑작스레 내리는 소나기를 만난다면 난처하기 이를 데 없을 것이다. 그저 하늘을 원망하며 마냥 젖을 수밖에. 하기야 낭만이라는 이름으로 일부러 비를 맞으며 걷는다고도 하지만, 어쩐지 청승맞은 모습으로 와 닿는다.

 

우리 조상들은 대오리로 만든 살에 기름종이를 바른 종이우산 혹은 갈대나 풀로 엮은 도롱이를 사용했다. 오늘날 흔히 사용하는 박쥐 날개 모양의 우산은 18세기 중반 영국의 J. 한웨이가 발명했는데, 당시에는 상류층의 양산으로 주로 사용되었고, 19세기 초에 와서야 일반화되었다고 한다.

 

아무튼 한쪽 어깨가 젖는데도 아랑곳하지 않고 우산 하나에 의지하여 다정히 걸어가는 연인의 모습에는 사랑이 가득 담겨 있다. 뿐이랴. ‘비를 맞으며 혼자 걸어가는 사람에게 우산을 내밀 줄 알면 인생의 진정한 의미를 아는 사람’이라는 말도 있다. 희로애락이 상존하는 우리네 삶 역시 수시로 우산을 폈다 접는 것과 별반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고 보니 우산은 단순한 비설거지 이상의 의미를 지닌 물건인 듯하다. 딱한 사정이 있는 누군가에게 따스한 인정으로 다가가는, 나눔의 기쁨을 공유할 수 있는 가교(架橋)라고나 할까. “자신을 사랑하듯이 이웃을 사랑하라.”고 한 공자님 말씀처럼, 차제에 우리도 우산이 되어 누군가의 팍팍한 가슴에 청량제로 다가간다면 썩 괜찮은 일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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