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중 양국 간의 교류에 대해 사람들은 일반적으로 육로가 주요한 통로라고 생각하지만 해양 교류사의 연구가 증명하는 바와 같이 상고(上古) 시기라 할지라도 해양을 통한 교류가 빈번했다.


당나라 때 가탐(賈耽)의 ‘황화사달기(皇華四達記)’에 기록돼 있는 4개의 바닷길 중에서 가장 오래 된 길은 바로 등주(登州)에서 고려와 발해로 진입한 항로, 즉 산동반도를 건너 요동(遼東)반도에 도착한 후 해안선을 따라 항해거나 직접 황해를 횡단하는 한·중 해상 항로였다. 이 항로는 가장 멀리 떨어져 있는 일본 규슈까지 뻗어 나갈 수 있었다.


이후 항해 기술의 발전에 따라 쿠로시오난류와 그 지류를 이용해 강소(江蘇)와 절강(浙江)지역 그리고 복건(福建)성의 해상(海商)들이 잇달아 북상하는 항로를 새로 개척하면서 한·중·일 간 해양교류가 더욱 활발해졌다. 제주는 바로 이 항로의 중심에 있었다.


탐라국에 관한 최초의 역사 기록도 중국 역사책인 ‘삼국지·위지·동이전(三國志·魏誌·東夷傳)’에 있다. 당시 제주를 ‘주호(州胡)’라고 칭했다.


‘주후(州胡)’ 이외에도 제주에 대해 중국 역사책에는 다양한 명칭들이 보인다. ‘위서(魏書)’에서는 ‘섭라(涉羅)’, ‘북사·수서(北史·隋書)’에서는 ‘탐모라(耽牟羅)’, ‘신당서(新唐書)’에서는 ‘담라(?羅)’라고 했다. 그리고 ‘탐부라(耽浮羅)’, ‘탁라(托羅)’, ‘둔라(屯羅)’등으로도 불렀다.


이에 대해 한치윤(韓致奫)이 ‘해동역사(海東繹史)’에서 ‘동국방음(東國方音)에 도(島)를 섬이라 하고, 국(國)을 나라라 하며, 탐(耽) 섭(涉) 담(?) 세음은 모두 섬과 비슷하다’고 풀이했다.


진(晉)나라에서 당나라까지 제주 사람들의 생활에는 큰 변화가 없었지만 항해기술은 발달했고 해상 항로에도 익숙했다는 것은 추측할 수 있다. ‘위지(魏誌)’의 기록을 보면 적어도 진수(陳壽)가 살던 진나라 시대에 탐라 사람들이 이미 배를 타고 한반도와 왕래하며 무역을 했었음을 알 수 있다. 파도가 거친 황해를 횡단하는 옛 제주 사람들이 지녔던 용기와 기술에 탄복할 따름이다.


송나라 때에 이르러 탐라의 선박들이 수시로 제주와 중국을 왕래하며 무역을 했고, 명·청(明·淸) 두 시기에 항해기술과 민간 무역이 발전하면서 제주 사람들의 중국과의 교류와 왕래가 더욱 빈번해졌다.


그 당시 한·중 두 나라의 왕조 모두 해금정책을 실시했기 때문에 제주와 중국 간의 왕래는 대부분 표류라는 특수한 형태로 이뤄졌다.

 

중국에 표착한 조선의 난파선 중에 제주의 빈도가 높은 것은 매우 놀라운 것이다. 필자가 집계한 명나라 때의 32개 조선 표류민 사례 중 적어도 18건은 제주와 밀접한 관계가 있음이 확실하다.


대만 학자의 통계에 따르면 1697~1884년간 조선에서 중국에 표류한 사건이 175건에 이르렀는데 그 중 제주가 차지하는 비율이 매우 높았다. 그래서 제주를 ‘표류의 섬’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반대로 중국 선박이 제주에 표류해 온 사례도 많았다. 청나라 때 200여 건의 중국 표류민에 관한 기록이 5분의 1가량 차지하고 있고 최소 30여 건이 제주도에 표착했다.


제주에 표착한 중국 표류민 중 대부분이 중국의 난방지역, 특히 강소성과 절강성 등 강남지역에서 표류한 것이었다. 이 때문에 제주 신화 속에 많이 나타나는 ‘강남천자국’이라는 지명이 중국 강남지역에서 표류해 온 사람들과 관계가 있을 가능성이 많다. 그래서 제주에서는 중국 동남 연해지구와 매우 유사한 풍습, 도구, 음식 등을 많이 볼 수 있다.


사람들은 ‘절해고도’라는 표현으로 제주도의 폐쇄성과 육지와 멀리 떨어져있는 상황을 자주 묘사하지만 필자가 볼 때 제주의 문화는 개방돼 있고 다원적이다.


한·중·일 해상 항로의 허브인 제주가 계절풍과 해류를 통해 신비롭고 다채로운 외부 세계와 연결돼 있었고 더 나아가 다양한 이국 문화 요소들이 다양하게 흡수돼 있다. 벽랑국 삼공주가 오곡의 씨앗을 가져왔다는 삼성신화가 제주 문화의 기원 그 자체부터 다양한 여러 문화들이 통합돼 있다는 점을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