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는 ‘기억’해 줄 때만 의미가 있다. 기억은 시간을 이긴 결과인데 그렇다고 모든 인간이 후대에 기억을 물려주는 것은 아니다. 그래서 우리 인간은 이 세상에 잠깐 왔다가 가는 것을 슬퍼하기 때문인지 어떻게든 기념되기를 소원한다. 소동파의 말대로 우리네 인생살이는 ‘날아가는 기러기 눈 위에 남긴 발자국 같은 것(應似飛鴻踏雪泥)’인지도 모른다. 인생은 ‘아침이슬(人生如朝露)과 같이 지나가는 나그네’로 말한 그의 비유는 오늘날까지도 먼 길을 떠나야 하는 우리들의 심금을 울리고도 남는다. 사람에게는 칠정(七情)이 있다. 기쁨(喜), 성냄(怒), 근심(憂), 생각함(思), 슬픔(悲), 놀람(驚), 두려움(恐) 등 마음에는 일곱 가지 감정이 있다는 말이다. 동양의학에서는 이 칠정이 만병(萬病)의 근원이 된다고 여긴다.


인생사에서 이 일곱 가지 감정 중 두려움은 나쁜 감정 중 하나다. 타인이나 역사적 사건으로 생겨나는 두려움의 감정을 다스리는 것은 의기(義氣)의 힘이다. 

 

   
▲ 전 김수 장군 방묘는 직사각형 형태로 석축이 무덤을 보호하고 있으며 두덤의 산담으로 둘러졌다.

▲산세미 오름 자락의 傳김수 장군 방묘


정확히 누구인지, 누구의 것인지를 알지 못하는 유적이나 유물을 말할 때 전(傳)이라는 말을 이름 앞에 사용한다. 傳은 역사적 사실로 입증되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전설이나 구전으로 내려오는 경우, 사실 자체를 무시할 수 없을 때 추정해서 쓰는 말이다. 여러 정황에 의해서 김수장군방묘라고 추정되는 경우 ‘傳김수장군방묘’가 되어야 한다. 


傳김수장군방묘는 제주도 기념물 제 60-3호로 지정된 고려시대 무덤이다. 제주시 애월읍 유수암리 산심봉 방묘라고도 한다. 은 산새미 오름은 산심봉(山心峰), 삼산악(三山岳), 삼선악(三仙岳), 삼심악(三心岳) 등으로도 불리며 옛 지도에는 활천악(活泉岳)으로 표기돼 있다. 산새미 오름의 높이는 표고 652m, 비고 100m로, 북쪽에서 보면 세 개의 봉우리가 이어진 굴곡진 형상이다. 傳김수장군방묘 동쪽 평지에 구전으로 전하는 짐수못, 일명 김수못이 있다. 여간 가물어도 못이 마르지 않아 아마도 어딘가에서 샘(泉)이 흘러드는 것 같다. 옛지도에도  ‘물이 나오는 오름〔活泉岳〕’이라는 지명이 예사롭지 않다.


傳김수장군의 방묘는 세월이 오래되어 봉분 자체가 낮아졌다. 지형은 약 15도 정도의 기울기를 가지고 산세미 정상을 배경으로 앞의 연못을 마주 보고 있다. 전형적인 직사각형의 봉분을 떠받치는 석축으로 무덤을 보호하고 있다. 방묘 앞부분에 평평하게 돌을 깔았는데 상석 대용이면서 무덤의 무게 중심을 떠받치는 역할도 한다.


傳김수장군 방묘는 앞면 길이 290cm로 5매의 판석으로 봉분을 지탱하고 있고,  뒷면 길이 290cm인데 판석 4매, 좌우 측면 길이가 480cm(좌측 판석 7매, 우측 판석 5매)의 석곽으로 두른 직사각형 무덤이다. 무덤은 남동향이다. 판석의 재질은 현무암으로 거칠게 다듬었다. 방묘 오른쪽에 원형 봉분이 하나 있고, 잡석으로 두덤의 산담을 둘렀다.   


안내판의 문화재 지정사유를 보면, “제주지역 고려말~조선전기에 조성된 방형석곽묘는 대부분 원형(原形)이 훼손되거나, 이장돼 있어 제주도 묘제사 연구를 위해서 원형의 방형 석곽묘의 보존이 필요한 실정이다. 유수암리 산심봉 방묘는 묘제의 축조양식과 매장방법 등이 제주도 묘제변천사에 중요한 단서를 제공하는 자료이고, 일설에는 김수 장군의 묘로 전해지는 등 학술적, 문화재적으로 가치가 평가” 된다고 했다. 사실 傳김수장군방묘는 이후 광산김씨 입도조 김윤조공의 방묘와 규모만 다를 뿐 양식적으로 연관이 크다.  


▲탐라에서 전사한 김수    


삼별초의 봉기는 몽골과 결탁한 친몽 세력이 개경 환도를 결정하자 1270년 5월, 여기에 위기의식을 느낀 반몽세력이 삼별초를 중심으로 항쟁한 사건을 말한다. 삼별초는 처음 고려 고종 때 최우(崔瑀)가 조직한 야별초(夜別抄)가 좌·우별초로 나누어지고, 다시 여기에 신의군(神義軍·神義別抄)을 합해 부르게 된 이름이다. 삼별초는 진도, 제주를 거점으로 약 3년간 결사 항전을 벌였다.  

 
삼별초 봉기는 고려 정부의 입장에서 보면 오늘날 다양한 역사적 평가와는 달리 왕조에 대한 반란에 불과했다. 고려정부는 이미 여몽 연합군이 진도 공격전에 삼별초가 패전하여 탐라로 도주할 것을 알고는 미리 관군을 파견했다. 1270년 9월, 당시 영암부사였던 김수는 전라도안찰사 권단의 명을 받아 고려의 관군 200명을 이끌고 삼별초의 탐라 점령을 저지하기 위해 입도했다. 이어 입도한 고여림(高汝霖) 장군은 김수와 함께 환해장성을 축성하여 삼별초의 탐라침략을 막고자 했다. 삼별초가 제주도에 입도한 것은 진도가 여몽 연합군의 공격을 받아 함락된 1271년 5월 15일 이후 약 6개월 뒤인 원종 11년(1270) 11월이다. 삼별초군은 이때 이문경에게 명하여 탐라를 점령하도록 했는데 이미 2개월 전 관군이 탐라를 방어하려고 입도했다는 소식을 접하고 있었다. 명월포로 상륙한 삼별초 장수 이문경(李文京)은 동쪽으로 진격하여 삼별초군을 제주시 화북동에 있는 동제원(東濟院)에 주둔시켜 진도 함락에 대비한 탐라 교두보를 확보하고자 했다. 마침내 김수, 고여림이 이끄는 고려의 관군은 삼별초군과 지금의 제주시 화북동·삼양동 경계에 있는 송담천(松淡川)에서 전투를 치렀으나 이문경에게 패하여 김수, 고여림 두 장수는 전사했다. 이에 삼별초 탐라 주둔군은 조천포를 장악하여 진도에서 후퇴한 삼별초 본군의 제주 입성을 도왔다. 김수가 전사하자 고려 정부에서는 그의 가족에게 충절에 보답하고자 부인에게는 쌀을 하사했고, 아들에게는 벼슬을 내렸다.

 

   
▲ 김수 장군 방묘 앞에 ‘고려충신 김수 장군 유적비’가 있다.

‘여지승람(與地勝覽)’에, 김수는, ‘담력과 지략이 남보다 뛰어나서 고여림을 따라 삼별초를 토벌할 때 진두지휘하다가 전몰하여 귀환하지 못했다.’고 전한다.


김수의 벼슬은 1255년 진사제(進士第)에 급제하여 감찰어사(監察御使), 영광부사, 문하시중(門下侍中)에 이르렀다. 김수는 ‘성품과 용모가 훌륭하고 아름다웠으며, 담력과 지략이 다른 사람보다 뛰어나 중앙과 지방의 관직에 종사하면서 청렴하고 유능했다.’평판을 들었다.


김수의 탐라에서의 행적을 보면  “시중(김수·필자주)이 그 선발에 뽑히자 집에서 숙식하지 않고 드디어 초군(抄軍)과 함께 급하게 가서 고여림과 탐라에서 만났다. 적들이 아직 진도를 차지하고 있으면서 탐라에는 이르지 못하였으므로, 이에 밤낮으로 성벽을 쌓고 병기를 수리하며 내습로를 끊어서 쳐들어오지 못하게 하였다. 그러나 지키는 사람들이 겁을 내어 움츠리고 힘을 다하지 아니하니 적이 다른 길을 거쳐 이르렀는데도 깨닫지 못하였다. 시중이 평소와 같이 대의로써 사졸(士卒)을 격려하니 사람들이 크게 감동하여 용기를 백배나 더하여 용감하게 소리치며 다투어 달려나가 적의 선봉을 거의 다 죽였다. 그러나 토착지방민(土人·탐라인)들이 적을 도와주게 되니 중과부적으로 마침내 고 장군과 함께 진중에서 전사하고 돌아오지 못하게 되어서 사람들이 지금까지 원통하게 여기고 있다.”라고 전한다.


김수의 부인은 고씨인데 102살까지 살았는데 눈과 귀도 밝아 건강하고 편안하게 임종을 맞았다. 고씨는 지아비 김수가 삼별초의 난 때 영광군수로써 탐라로 급파되자, 겨울옷을 지어 보내려고 하는데 주위의 동료가 백금(白金)으로 그 비용을 보태려고 해도 끝내 받지 않았다고 한다. 고씨는 김수가 탐라에서 전사하자 60년을 홀로 살며, 친척, 노복(奴僕)과 첩에게도 인자한 것이 부군이 살아있을 때처럼 어린 아들을 잘 키웠다. 김수는 아들이 둘 있었는데, 큰아들 신호위녹사참군(神虎衛錄事參軍) 태일(台一)은 동생보다 먼저 죽었고, 동생 태현(台鉉)은 상호군 판전리사사(上護軍 判典理司事)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