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이영철 작가가 네팔 안나푸르나 트레킹의 최고 정점인 해발 5416m에 오른 모습.

낯선 길을 가다가 갈림길에서 종종 주저했다.

이정표가 없고 지도 표시도 애매했다. 망설임 끝에 한쪽 길을 택했다. 목적지에 맞게 간 방향은 절반에 불과했다. 갈림길로 되돌아 올 때가 많았다.

대기업 임원 출신으로 일의 능률과 효율을 따져왔던 그에게 헛걸음은 무의미한 시행착오이자 에너지 낭비였다.

그런데 걷기여행을 하다 보니 잘못 들어선 길도 낯선 곳을 새로 알게 해 준 소중한 기회임을 깨닫게 해줬다.

▲가난했던 어린 시절=1957년 제주시 한림읍 금능리에서 3남 중 장남으로 출생한 이영철 여행작가(60)는 재릉초등학교, 한림중과 제주중앙중을 다닌 후 제주일고를 졸업했다.

학창시절 아버지가 보증을 잘못서는 바람에 집안은 풍비박산이 났다. 온 가족이 고향을 떠나야 했다.

한림중에서 1학년을 다닌 후 제주시로 이사를 갔다. 어머니는 광양로터리에 있던 시외버스터미널에서 국밥집을 열었다.

부친은 일찍 세상을 떠났다. 가난한 생활 속에 어렵게 학업을 마쳐야했다.

그는 전남대 화학공학과에 입학했다. 빨리 취직해 돈을 벌겠다는 생각뿐이었다. 1981년 삼성그룹에 공채로 입사했다.

발령지는 삼성그룹 계열사인 전주제지였다. 삼성그룹 창업주인 이병철 회장이 1968년 설립한 전주제지는 1992년 한솔제지로 사명을 변경했다.

지난해 한솔제지의 매출액은 1조5300억원으로 국내 제지업계 1위다.

평사원에서 대리·과장·차장을 거쳐 20년 만에 대기업 부장에 올랐다.

이어 임원(상무)으로 9년을 재직했다. 2011년 부사장 후보에 올랐으나 아쉽게도 탈락했다. 치열했던 29년의 직장생활을 마감했다.

 

   
▲ 이영철 작가가 남미 트레킹 중 볼리비아 유우니 소금사막을 방문한 모습.

▲도보여행을 떠나다=퇴직 후 갈 곳이 없었던 그는 남해 바래길(74㎞)로 도보여행을 떠났다.

3박 4일을 꼬박 걸었지만 피곤하지 않았다. 그는 “첫 걷기여행은 내 남은 인생이 시작되는 첫 날이었다”고 회고했다.

제주에 올레길이 있는 것처럼 전 세계 10대 트레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2012년 네팔 안나푸르나 트레일(140㎞)을 시작으로 스페인 산티아고 순례길(782㎞), 뉴질랜드 밀포드&마운트쿡(88㎞), 페루 잉카트레일(49㎞), 칠레 토레스 델 파이네(76㎞), 아르헨티나 피츠로이(40㎞), 영국 코스트 투 코스트(315㎞), 투르 드 몽블랑(170㎞), 아일랜드 위클로웨이(132㎞), 중국 차마고도(60㎞), 일본 규슈올레(206㎞) 등을 섭렵했다.

5년 동안 총 2829㎞를 걸었다.

걷기여행은 기록으로 남겼다. 안나푸르나에서 산티아고까지(2013), 동해안 해파랑길-걷는 자의 행복(2014), 투르 드 몽블랑, 영국을 걷다(2017) 등 4권의 여행서를 펴냈다.

생생한 여행기와 사진을 수록한 여행서는 트레킹 가이드북으로 인기를 끌었다. 어느덧 지명도 있는 여행작가의 반열에 올랐다.

프랑스·스위스·이탈리아 3개국에 걸쳐 있는 몽블랑 일주 트레킹을 담은 ‘투르 드 몽블랑’과 코스트 투 코스트 워크(Coast to Coast Walk)를 알려준 ‘영국을 걷다’는 국내에서 처음 소개된 여행서였다.

4권의 여행에세이는 남들이 가지 않았던 곳을 갔었던 도전과 모험에서 나온 산물이었다.

 

   
▲ 이영철 작가 페루 잉카 트레일에서 마추픽추를 배경으로 찍은 사진.

▲힘든 만큼 보람된 여정=몽블랑 둘레길은 최저 해발 960m에서 최고 2600m를 10일 간 오르고 내려와야 하는 힘든 코스다.

누적 고도만 1만m에 달한다. 매일 한라산을 한번 올랐다가 내려오기를 반복한 셈이다.

“알프스의 수많은 산들 중에서 몽블랑을 중심으로 십 여 개의 산들을 오르고 내리는 투르 드 몽블랑을 위해 쓴 경비는 245만원입니다. 누구나 부담 없이 갈 수 있다는 것을 보여주기 위해 매번 최소한의 경비로 해외 트레킹에 나섰죠.”

그는 2015년 잉글랜드 북부의 세인트비스를 출발, 북해가 보이는 로빈후즈베이까지 315㎞를 횡단했다.

우리나라로 치면 인천 월미도에서 강릉 정동진까지 횡단하는 코스다.

영국을 대표하는 장거리 트레일로 유럽인들에게 사랑을 받고 있지만 우리나라엔 그동안 알려진 바가 없었다.

이 코스에 있는 레이크 디스트릭트에는 낭만파 시인 워즈워스의 생가와 무덤이 있다.

광활한 황무지인 요크셔지방은 소설 ‘폭풍의 언덕’의 에밀리 브론테와 ‘제인 에어’의 샬롯 브론테 자매가 굵고 짧은 생애를 살았던 곳이다.

그는 “걷는 도중에 소설 ‘폭풍의 언덕’ 속 히스클리프와 캐서린이 함께 말을 달리던 환영을 자주 만났다”며 “19세기 유물과 같은 시골가옥과 드넓은 초원은 꿈속을 걷는 것 같았다”고 평했다.

 

   
▲ 안나푸르나 트레킹을 마치고 카트만두에서 만난 거리의 수도사와 사진을 찍은 모습.

▲전 세계인을 만나다=걷기여행을 통해 그는 매일 다양한 사람들을 만났다. 이들과 함께 먹고 잤다.

귀국 후에는 이메일로 사진과 여행정보를 주고받았다.

그가 펴낸 4권의 여행서가 생동감이 있고 아기자기한 역사·문화 배경을 실을 수 있었던 것은 현지인은 물론 걷기여행에서 만난 사람들과 정보를 교환했기 때문이다.

앞으로의 계획은 아일랜드와 중국 차마고도 등에서 걷기가 아닌 한 달 이상 살기다.

현지에 오래 머물면서 사람들을 사귀고 역사·문화·전통을 탐방해 그 나라의 속살을 보여주는 책을 쓸 예정이다.

 

   
▲ 아일랜드 위클로웨이 트레킹 중 만난 81세의 도로시 여사와 사진을 찍은 모습.

▲글쓰기 고향에서 터득하다=그는 방학 때마다 고향에 내려와 제주대학교 친구들이 만든 문학동아리인 ‘몰방(말방아) 서클’에 가입해 활동했다.

공대생이었지만 도스토옙스키에 대한 글을 쓰면서 상금을 받기도 했다.

한솔제지 임원 당시 기획과 마케팅을 하면서 간결하고 핵심을 추려내는 문서를 작성한 것도  글쓰기에 도움이 됐다.

그는 제주에 1000만명이 넘는 관광객이 찾아오지만 앞으로 양보다 질이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그는 “뉴질랜드의 원시림이자 영화 반지의 제왕의 배경이 된 밀포드는 하루에 80명만 받고 1년에 6개월만 출입을 허용한다”며 “1년 전에 예약하지 않으면 갈 수가 없다”고 말했다.

그는 제주의 자연경관에 많은 사람들이 찾는 것보다 지속적으로 보전하기 위해 출입기간과 인원을 제한해야 가치가 높아지고 더욱 주목을 받을 수 있다고 조언했다.

이 작가는 시간이 날 때마다 부인 권순남씨(58)와 국내 곳곳을 걷는 여행으로 인생 2막을 즐기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