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569년 전인 1448년 지어진 관덕정은 보물 제322호로 지정됐다.

제주성(城)이 있던 원도심은 탐라국시대부터 고려, 조선, 근·현대까지 천 년 동안 제주의 정치·사회·경제·문화의 중심지였다.

제주시 일도1동, 이도1동, 삼도2동, 건입동 등을 아우르는 옛 제주성 일대의 원도심에는 제주의 영광과 회환을 간직한 문화유산이 즐비하다.

▲관덕정=관덕정은 조선시대 목조건축물 중 오늘날까지 유일하게 남아 있는 최고(最古)의 유산이다.

1448년(세종 30) 제주목사 신숙청이 병사들의 무예 수련을 위해 훈련청으로 창건했다.

현판인 ‘觀德亭’의 편액은 세종대왕의 셋째아들 안평대군의 글씨였으나 화재로 소실됐다. 현재의 글씨는 선조 때 영의정을 지낸 이산해가 썼다.

조선시대 과거시험과 활쏘기 대회 등 중요 행사는 관덕정 광장에서 치러졌다.

1901년 신축교안(이재수의 난) 당시 이재수는 관덕정을 접수해 민초를 이끌었다. 이재수는 관군에 의해 압송돼 서울 청파동에서 참수됐고, 그의 시신은 수습되지 않았다.


1947년 관덕정 광장에서 열린 3·1시위와 경찰의 발포는 4·3의 도화선이 됐다. 1949년 무장대 사령관 이덕구의 시신은 이곳에서 십자형 틀에 묶어 대중에게 전시됐다.

관덕정 광장에선 1949년 제주를 방문한 이승만 대통령의 환영대회가 개최됐고, 1960년에는 이 대통령 하야를 촉구하는 학생 궐기대회가 열렸다.

 

   
▲ 조선시대 통치 중심지였던 제주목 관아 전경.

▲제주목 관아=제주목 관아(濟州牧 官衙)는 행정·경제·군사·사법 등 전 분야를 통치했던 제주목사가 머물던 곳이었다.

1434년(세종 16) 대화재로 관아 건물은 모두 소실됐다. 22대 목사인 최해산이 재건을 시작해 조선시대 내내 증축과 개축이 이뤄져 20동 206칸 규모에 이르렀다.

화재에 대비해 관아 건물은 서로 닿지 않았고 담장을 둘렀다.

관아 외대문에선 하루에 6번 수문장 교대와 순찰이 이뤄졌다. 외대문 2층 누각에는 종루가 설치돼 새벽과 저녁에 종을 쳐 성문을 열고 닫았다.

조선시대 500여 년(1392~1910년) 동안 286명이 제주목사가 부임했다. 초대 목사는 1393년(태조 2) 부임한 여의손이며, 마지막 목사는 일제강점기가 시작된 1910년 임명된 서병업이다.

1915년 이마무라 도모 초대 도사는 부임 후 도민들의 구심점인 관아 건물을 파괴했다.

관아 터에는 경찰서와 법원, 우체국과 세무서, 전매서 등 신식 건물이 차례대로 들어섰다.

제주시는 탐라순력도를 통해 제주목 관아 건물의 모습과 배치도가 확인됨에 따라 1999년부터 2002년까지 175억원을 들여 9동을 복원했다.

▲제주성 옛길=제주성 옛길은 제주사람들의 삶의 공간이었다. 동네를 뜻하는 제주사투리 ‘골’ 또는 ‘굴’이 붙여져서 옛길 이름이 됐다.

칠성골은 조선시대 중심 도로였다. 그래서 일제시대 상점가는 읍성 중심부인 칠성통(본정통·本町通)과 관덕로(원정통·元町通), 남문 한짓골, 서문한질 일대에 자리 잡았다.

성터의 해자가 남아 있는 마을을 ‘성굽’이라 했다. 원래 서문사거리에서 탑동 해안변까지 이르는 길이었지만 지금은 제주성 옛길을 통틀어 ‘성굽길’이라 불리고 있다.

조선시대 500년 동안 제주에는 260여 명의 유배인이 왔다. 이들 대다수는 제주성내 적거지에서 살았다.

제주에 온 유배인 중 왕족은 있었지만 왕은 광해군(1575~1641)이 유일했다. 원도심인 중앙로 KB국민은행 제주지점 앞에는 광해군 적소터 표지석이 있다.

광해군은 유배 생활 중 계집종이 “할아범”이라고 멸시해도 참았다고 전해오고 있다. 만인지상에서 죄인이 된 그는 제주에 온 지 4년 4개월 만인 1641년 7월 1일 67세 나이로 병사했다.

일국의 왕으로는 쓸쓸한 최후였지만 조선에서 4번째로 장수한 임금이기도 했다.

조선 중기 대학자이자 노론의 거두인 송시열(1607~1689)은 장희빈이 낳은 아들(경종)의 왕세자 책봉은 시기상조라며 반대했다가 숙종의 노여움을 사 83세 고령임에도 유배를 왔다.

송시열은 산짓골 윤계득의 집을 적소로 정해 3개월 동안 생활했다. 그러나 남인들이 그를 다시 국문하도록 요청하면서 서울로 압송하던 중 정읍에서 사약을 받았다.

   
▲ 조선시대 제주목사 행차를 재연한 모습.

▲제주의 젖줄 산지천=오늘날의 성곽 형태를 갖추게 된 것은 1565년 곽흘 목사 때였다.

곽 목사는 산지천을 성안으로 들이기 위해 동성(東城)을 뒤로 밀려서 지금의 제주지방기상청 일대까지 확장했다.

외적의 침략에 대비해 남에서 북으로 흐르는 산지천이 제주성 안으로 들어오면서 물을 끌어 들이거나 흘려보내는 수구(水口)가 필요해졌다.

1599년 성윤문 목사는 남수구와 북수구 2개의 수구를 축조했다. 또 남·북수구를 건너기 위해 아치형 무지개다리인 홍예문(虹霓門)이 설치됐다.

그런데 산지천을 끌어들인 결과 하천이 범람 할 때마다 침수 피해를 자주 입었다.

 

   
▲ 생태하천으로 복원된 탐라문화광장의 산지천 전경.

1780년(정조 4) 김영수 목사는 홍수 피해를 막기 위해 산지천변을 따라 이중으로 제방용 성곽을 쌓았다. 성 사이에 성을 쌓아 간성(間城)이라 불렸다.

제주특별자치도는 원도심 재생 활성화와 문화·예술 공간 확보를 위해 586억원이 투입해 탐라문화광장을 조성했다.

광장의 중심인 440m 길이의 산지천은 옛 모습의 생태하천으로 되돌려 놓았다.

은어 떼가 다시 찾아온 산지천 주변에는 탐라·북수구·산포광장 등 3개 광장과 산짓물공원, 수중·벽천·음악분수가 들어서면서 제주를 상징하는 역사·문화·축제 공간으로 자리매김하게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