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효를 상징하는 기념물


효(孝)는 주나라(BC 1046~771)에서부터 사람의 관계를 도덕적으로 규정하는 덕목이었다. 주나라에서 효는 조상을 숭배하고 조상과 후손이라는 근본에 보답하기 위해 대를 이어가는 생명의 계승과정이었다. 효는 한나라에 이르러 부모와 자식 간의 도덕적 관계가 확장되어 군신의 관계로 발전하면서 국가 수호의 목표를 지니게 되었지만, 여전히 그 저변에는 부모와 자식 간 효의 도덕적 관계가 면면히 흐르고 있었다. “한나라는 효에 따라 천하를 다스리다(漢以孝治天下)가 결국 ‘以孝治天下’ 효로써 천하를 다스리게 되었다. 성리학이 고려 때 안향에 의해 흥성한 이후 마침내 조선의 국교가 되었다. 이때 성리학의 의례 교본이라고 할 수 있는 ‘주자가례’가 널리 보급되면서 효·충 사상이 오늘날까지도 우리에게 영향을 미치게 된 것이다. 상장례(喪葬禮)는 예사상의 백미라고 할 수 있다.

 

오늘날은 효의 의미가 많이 퇴색되었지만 효사상이 조선 왕조를 지탱하게 한 이데올로기를 통한 국가 통치 수단임은 틀림없었다. 그러나 순수하게 효라는 의미를 살펴보면 매우 아름다운 도덕 정신이다. 자신을 낳고 길러 주느라고 일생을 헌신한 부모에게 그 공을 갚는다는 것은 한마디로 사랑을 바탕에 둔 인간의 아름다운 행위이다.


‘설문해자(說文解字)’에 보면, ‘孝, 善事父母者. 從老省, 從者, 子承老也’라 했다. 효는 부모를 잘 모시는 것이다. 글자는 노(老)의 아랫부분이 생략된 꼴에다가 자(子)의 글자가 합쳐진 모양이다. 자식이 나이가 많은 부모를 받들어 모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효(孝)에는 그 글자에 노인과 젊은이를 이어주는 계승의 의미가 들어있기 때문에, 오랜 경험과 새로운 시작의 만남이라는 시간적 의미를 포괄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 효의 상징으로 무덤은 나와 나의 선대라는 의미의 우리 가문의 기념물이 되는 것이다.   

   
▲ 반디기 왓 명혈지에는 김보의 아버지 김자신의 방묘가 있다. 도굴을 방지하기 위한 시멘트가 사면을 두르고 있다.

▲효와 극치, 명당


‘인자수지(人子須知)’에, “명당(明堂)이란 천자의 당(堂)인데 천하를 살필 수 있고 모든 곳에서 만물을 바치고자 모이는 곳이다. 묘혈이 좋은 자리를 명당이라 하는 데 산세를 모으고 물을 돌아 흐르게 하기 때문이다. (…) 무릇 산세는 느리게 와서 평평한 곳에 혈(穴)을 만들고, 용호(龍虎)는 감싸 안으며 가까운 곳에 기대는 곳을 내명당(內明堂)이라고 한다. 내명당이 너무 넓으면 허해서 흩어지게 되고 그러면 장풍(藏風)이 안 되며, 너무 좁으면 기가 모이는 곳이 급해서 귀(貴)함이 사라져서 안 되니, 넓이가 적당하고 사방 둘레가 분명하면서도 낮거나 습하지 않고 기울지도 않으며, 흐르는 물은 메마르지 않고 동산이 안에서 튀어나오지도 않고 거친 돌도 없어야 한다. 외명당(外明堂)은 양쪽 경계가 거리낌 없이 펼쳐져 협착(狹窄)하지 말며, 사방이 둘러싸여 빈 곳이 없어야 하며 물이 안으로 서서히 들어오면 길한 것이다.”라고 했다. 한 마디로 명당이란 사방을 적당히 막아 포근하고 그 안은 평지를 이루고 바람이 흩어지지 않고 물은 잘 빠져나가는 곳, 좁지도 급하지도, 또 거친 돌들이 솟아 있지 않은 지형이라고 할 수 있다.


제주의 6대 음택 명혈이 있으니 제1혈이 사라악 명혈지로, 한라산 사라악을 이름이다. 산의 생긴 모양이 마치 기운이 센 뱀이 개구리를 쫓는 것 같다고 하는 생사축와형(生蛇逐蛙形)이다. 제2 혈은 개미목 명혈지로, 이 명혈은 많은 군사를 거느리고 당당하게 출정하는 장군솔군형(將軍率軍形), 또는 죽은 꿩을 벽에 걸어 놓은 형국인 사치괘벽형(死雉卦壁形)이라고도 한다. 제3 혈은 영실 명혈지는 중국의 주자의 아버지가 묻혔다는 전설이 깃든 곳으로, 아침이면 봉황새가 울어대는 형국인 봉명조일형(鳳鳴朝日形)으로 큰 선비가 날 자리라고 한다. 제4 혈은 돗트멍 명혈지다. 이 명혈지는 윗세오름에서 서북쪽으로 약 1km 지점의 볼록한 두덩으로 한라산 정상으로부터 서쪽으로 흐르는 지형이다. 돼지코에 해당하는 혈지에 덕전(德田) 마용기 스님의 아버지 마희문(馬喜文)의 무덤이 자리하고 있다. 제5 혈은 반디기 왓 명혈지(班得田)이다. 이 반디기 왓 명혈지는 마치 누런 뱀이 숲에서 나오는 형국이라고 하여, 황사출림형(黃死出林形)이라고 한다. 제6 혈은 반내왓(蟠花田) 명혈지로, 이 명혈지는 만 마리 소를 거느리는 부자가 날 형국인 서우독만형(西牛犢萬形)이라고 한다. 

 

   
▲ 김자신 방묘의 산담은 높이 때문에 신문을 우측 계단으로 오르내리게 만들었다.

▲제주의 음택 묘혈 반디기 왓


반디기 왓 명혈지는 경주 김씨 제주의 가문을 세상에 있게 한 제주의 6대 음택 명혈지 중 제5 명혈지로 꼽힌다. 반디기 왓에는 경주김씨 입도 4세인 김자신(金自愼)의 합묘 방묘가 있다. 김자신의 벼슬은 건공장군 호조참의(建功將軍 戶曹參議)로 부인은 복성 문씨이다. 장남은 김보로 보에 의해서 반디기 왓 명당에 묻혔다. 김만일은 김자신의 증손이다. 김자신 방묘의 뒤편에는 후손이 묻혀있다.


김자신의 합묘 방묘는 앞면 5m, 측면 5m 80cm,  후면 4m 70cm, 높이는 약 170cm. 하단에 도굴을 방지하기 위해 70cm 높이로 시멘트로 사면을 둘렀다. 도굴 방지를 위해 무덤을 지키는 바람에 보물이 묻혔다고 하여 마을 사람들은 보물무덤이라고도 한다. 산담은 웅장하여 높이 때문에 우측으로 신문을 계단식으로 오르내리게 만들었다.       


경주 김씨 입도조인 김검룡의 방묘는 입도 4세 김자신까지 이어오는 데 제주도에 방묘의 계승과정을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처음 방묘를 구축한 입도조가 모델이 돼 최소한 70여 년의 세월 동안 무덤의 양식은 변하지 않다가 입도 5세 김보(金譜)에 이르러 원묘로 바뀌었고 원묘의 양식이 다시 6세 김이홍, 7세 김만일까지 이어오다가 조선시대 대표적인 무덤 양식인 용묘로 바뀌게 된다. 한 집안의 묘제 양식이 200년 사이에 방묘→원묘→용묘로 바뀌는 시간적 과정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집안은 몇 안 된다.  


또 명혈지 반디기 왓 기원의 풍수설화는 경주김씨 가문의 집안 내력을 잘 말해주는 데 호종단의 풍수 압승설을 피한 입도 5세 김보의 노력으로 음택과 양택 모두 명당을 얻게 된 후 입도 7세 김만일에 이르러 가문의 영예가 활짝 피게 된다. 반디기 왓은 민오름으로 현무를 삼았고 오행으로 볼 때 금형(金形)의 산이다. 민오름으로 한라산의 주산을 살짝 가리면서 반디기 왓으로 지기(地氣)를 모아주고 있는데 김보의 아버지 김자신의 방묘가 있는 곳이 바로 그 혈처이다.

 

반디기 왓은 민오름 앞으로 완만하게 펼쳐진 평원인데 낮지만 좌청룡 우백호의 산세가 뚜렷하여 반디기 왓을 포근하게 안아주고 있다. 이런 지형을 평강명혈지라고 하는데 용호수(龍虎水)가 뚜렷이 나타나지 않아 단지 평지에서 ‘한 치라도 높으면 용이요. 한 치라도 낮으면 물이다(송성대, 2000:159)’. 민오름을 타고 완만하게 흐르는 지맥은 내명당수인 의귀천을 앞에 두고 풍광의 조화를 이루고 있는데 경주 김씨 집안의 초지가 목장지로도 손색이 없는 까닭에 소위 말 재벌가의 입지도 높은 것이 당연하다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