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인생의 팔할은 신문이 선생이다.’ 어느 신문에서 보았던 글인데 기억이 또렷하지 않아 몹시 안타깝다. 스크랩이라도 해 둘 걸 하는 후회가 겹친다. 나는 이 글을 읽으면서 긍정의 뜻으로 고개를 끄떡였다.

대놓고 말하기는 객쩍지만 나에겐 종이신문이 선생이고 벗이다. 이들과 함께한 세월이 반세기를 넘긴 지 한참 된다. 나는 어린 시절에 신문과 친교를 맺었다. 그때가 4·19의거, 자유당 정권에서 민주당 정권으로, 그리고 5·16 군사쿠데타로 이어지던 격변기가 아니었나 싶다.

그해 여름, 동네 쉼터에 사람들이 모여들어 담소를 나눴다. 어른들은 조심스럽게 시국 이야기를 했다. 간간히 시국이 어수선하다는 말을 들었던 것 같다. 그날 나는 본의 아니게 어른들 이야기를 엿듣게 되었다.

어른들 중에 유일하게 대학을 나온 분이 있었는데, 그분이 신문을 보며 담론을 이끌었다. 그 이가 이 신문의 사설을 다 읽으면 대학 졸업 정도의 한자 실력은 될 것이라는 말을 하는 것이었다. 귀가 쫑긋했다.

그 말은 나에게 큰 울림으로 다가섰다. 후에 대학에 가고 못 가는 건 알 바 없으나 신문 사설을 열심히 읽어 대학 졸업과 맞먹는 한자 실력을 쌓고 싶은 충동이 일었다. 그 욕구는 절실하게 나를 압박했다.

신문 구하는 일이 급선무였으나 쉽지 않았다. 방법은 딱 하나, 신문을 받아 보는 집에 가서 잔심부름을 해주고 신문을 얻어오는 것이었다. 마을에서 딱 한 집이 신문을 구독했는데, 다 읽은 신문도 거저 버리지 않았다.

그때는 신문지가 다양한 용도로 쓰였다. 잔칫집에서도 요긴하게 쓰이고 잡다한 일용품을 포장하는 데도 한 몫을 했다. 그렇게 귀한 대접을 받는 신문지를 얻어다가 사설 읽기에 몰입하기까지는 발품깨나 팔아야 했다.

어머님은 틈만 나면 신문을 펼치는 아들을 못마땅해하셨다. 그도 그럴 것이 집안일은 뒷전이고, 석유등잔의 심지를 돋우며 신문과 씨름하기 일쑤였으니까. 전기가 들어오지 않는 마을이라 등피의 그을음 닦는 건 당연히 내 몫이었다.

그 시절 신문은 한글 한자 혼용이었는데, 사설에는 어려운 한자가 유독 많았다. 삼 일에 한 번 우편으로 배달되는 중앙지도 지면이 지금처럼 많지 않았다. 광고란은 거의가 영화 선전 일색이었고 ‘김승호’, ‘최은희’를 비롯한 유명 배우들 얼굴이 지면을 가득 메웠다.

어렵게 빌려 온 귀 닳은 옥편에서 한자를 찾는 것도 지난했다. 옥편의 한글 표기에 생소한 고어가 섞여 있어 한동안 속을 썩였다. 처음엔 사설을 다 읽어야 대학 졸업과 맞먹는 한자 실력이 될 것이라는 말만 염두에 두었다.

딴전 피우거나 좌고우면할 겨를이 없었다. 그러다가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연재소설에도 눈독을 들였다. 신문의 본문 하단에 연재되던 소설은 늘 아슬아슬하게 마감되어 가슴을 설레게 했다. 지금은 연재소설도 사라지고 사설의 논제도 여럿으로 나뉘어 간결하지만 그때는 사설이 한 논제로 채워져 지루하게 느껴졌다.

굳이 자랑할 건 못되지만 내 한문 실력이 신문 사설 읽는 수준쯤 되는 것도 그때 우직하게 사설을 파고들었던 결과가 아닐까 싶다. 그 후로 갈망, 향수, 신비, 이런 낭만의 언어 쪽으로 눈길을 돌릴 즈음에는 신문은 늘 새로운 감동으로 나를 유혹했다.

그 서정적이고 낭만이 담긴 언어들은 내게 가뭄에 단비가 되기도 했고 죽비처럼 깨우침을 주기도 했다. 겸연쩍기는 하지만, 나는 종이신문에서 인생을 읽었다. ‘내 인생의 팔할은 신문이 선생이다.’ 이 말은 내가 꼭 하고 싶은 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