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제주시 조천읍 신촌리에 있는 조군현 가옥 전경.


과거 제주의 민가는 대부분 초가였다. 조선 중조 때 유배를 온 김정(1486~1521)은 풍토록에서 ‘사람들은 모두 초가에 살면서 기와집은 극히 드물었다. 정의현과 대정현의 관사도 지붕을 풀로 이은 초가였다’고 기록했다.

1629년(인조 7)부터 1823년(순조 23)까지 200년간 국법으로 출륙금지령(出陸禁止令)이 시행됐지만 17세기 말부터 약화되면서 제주인들은 바다를 건너 다른 지방과 교역을 하기 시작했다.

이를 통해 부를 축적한 상인들이 기와집을 짓고 살았다. 주로 교역항이 있던 제주시 화북·신촌·북촌 일대에 기와집이 많았다. 제주의 기와집은 부의 상징이었다.

바람이 잦은 제주에선 기와가 컸고, 처마와 용마루 끝은 막새로 막음질을 하지 않고 잘 붙는 진흙을 채워 튼튼하게 기와를 고정하는 독특한 모습을 띄고 있다.

지붕이 무거워서 대들보와 기둥은 굵고 단단한 나무를 사용했고, 고급스럽게 치장했다.

조천읍 신촌리에 있는 조군현 가옥(도 민속문화재 4-6호)은 1822년(순조 22)에 지어진 기와집이다. 집 구조는 마당을 중심으로 ㄷ자형으로 배치됐다.

정사각형에 가까운 마당을 두고 동쪽에 안거리, 맞은편에 이문간을 겸한 밖거리가 서쪽을 향해 있다.

안거리에는 정지(부엌)를 두지 않고 모커리에 독립된 부엌간을 뒀다. 서북풍을 차단하기 위해 서쪽 울담을 따라 대나무를 심었다.

상방(마루) 우측에는 제기를 보관하는 장방을 설치했다.

신촌리에는 이 가옥 외에 기와집들이 여럿 있었으나 대부분 철거됐다. 조군현 가옥은 2013년 해체 후 보수됐다.

이 집에선 민족교육과 조국 부흥에 헌신한 조규훈 선생(1906~2000)이 출생했다.

그는 일본에서 벌목사업과 제재소, 고무공장을 경영해 부를 축적해 건국 초·중·고등학교를 설립했다. 제7·8대 재일본민단 중앙본부 단장을 역임하기도 했다.

조천읍 조천리에 있는 조천 황씨종손 가옥(도 민속문화재 4-5호)의 안거리는 450년 전에 지어졌다.

 

   
▲ 조천읍 조천리에 있는 황씨 종손 가옥 모습.

문간을 들어서면 직사각형 모양의 마당을 중심으로 북향의 안거리, 남향의 밖거리, 동향의 모커리가 각각 ㄷ자형으로 배치돼 있다.

네 칸의 집인 안거리는 마루가 넓어 제사를 모시는 종가의 모습을 잘 보여준다. 안·뒤 공간과 연결된 2칸의 뒷낭간은 집안의 사적인 공간 역할을 하고 있다.

세 칸 집인 밖거리의 경우 상량문을 보면 1940년에 지어진 것을 알 수 있다.

밖거리의 ‘머릿방’과 ‘협문’은 근대 시기에 상류 주택에 종종 나오는 것으로 지금까지 잘 보전돼 있다. 

전통적인 안거리와 근대 시기에 지어진 밖거리가 공존하는 가옥은 전체적으로 크지 않지만 상류 주택으로서 제주 기와집의 품격을 잘 간직하고 있다.

이 집에는 7대가 대대로 머물렀으며, 지금도 자손인 황태희 전 조천읍장이 살고 있다.<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