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조선어학회 학자를 고문한 악명 높은 고등계 경찰 응징
(8)조선어학회 학자를 고문한 악명 높은 고등계 경찰 응징
  • 고동수 기자
  • 승인 2017.09.2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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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문일, 야학 통해 독립 역설...혁명가.단결가 등 노래 전파
목사 강문호, 일생을 교회.나라.제주 걱정...공적비로 추모
강민수, 법정사 항일운동.강병희, 혁우동맹 강창보 도움
▲ 무오 법정사 항일운동 발상지인 서귀포시 하원동 일대에 지어진 의열사 전경.

강문일康文一:1911(일제강점기)~1967, 독립운동가. 하귀리<귀일> 야학에서 항일활동. 본관은 곡산, 강성휴康性休의 아들로 애월읍 하귀리<귀일>에서 태어났다. 1935년 8월 23일 기소, 제주지법 목포지청에서 징역 1년을 선고받자 항소하여 1936년 6월 25일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에 집행유예 4년을 선고받았다. 앞서 1922년 이웃 마을 신엄리에 소재한 사립 일신日新학교에서 1년 동안 배우고 1926년에 일본으로 건너가 오사카의 금구金歐소학교의 야간부에서 5년을 수료하였다.

 

전기제작소 공원으로 일하던 중병으로 1933년 1월 귀향, 동년 8월 하귀리 2구區에서 박영순朴榮淳 등과 함께 야학을 설치 운영하면서 민족의식을 고취하였다. 그가 일본에서 화하류靴下留전기제작소에서 일하던 때 일본공산당 당원 김귀영金貴榮(하귀)의 영향을 받아 사회주의 사상에 공감, 일본 제국주의 타도를 위한 실천 방침으로써 무산아동에게 항일의식을 주입하기 위하여 박영순과 뜻을 모은 뒤 귀향하였다. 1933년 8월 야학을 설치하여 일제 식민지 통치의 부당성을 역설하던 중 1934년 12월 야학을 확대 발전시키기 위하여 하귀리 1구에서 김홍규金弘奎, 김을봉金乙鳳 등이 운영하던 야학과 통합하였다. 통합 후 60여 명의 학동들에게 식민지 수탈의 실상을 알리고 한국인의 피폐를 극복하기 위해서 한국 독립의 달성을 역설하였다.

 

한편으로 이천만가二千萬歌, 혁명가, 단결가 등의 노래를 가르치면서 항일의식을 고취하였다. 이 일로 전협全協계 인물들인 배두봉裵斗鳳(점원, 22), 강문일(25), 박영순(20), 김을봉(20), 김홍규(21) 등이 1935년 5월에 체포되었다. 출옥 후 중국 상하이<上海>로, 다시 일본으로 건너갔다가 조국이 광복되자 귀향했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5년 광복절에 건국포장을 추서하였다.

 

강문호康文昊:1899(광무3)~1986, 기미 3·1 운동 당시 군산群山 영명학교 학생의 항일활동. 기독교의 목사, 장로교의 종교 지도자. 본관은 신천, 강이석康利錫의 아들로 산남 중문리<중-물>에서 태어났다. 호는 삼우三憂인데 교회 근심, 나라 근심, 제주 근심을 하여 지어진 아호이다. 항일운동으로 체포되어 1919년 4월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6월형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앞서 1914년 중문에서 최대현崔大賢 전도인에 의해 동향의 친구 강규언姜圭彦과 함께 기독교 신자가 되었고 당시 전라북도 옥구군沃溝郡 개정면開井面 구암리龜岩里에 있는 기독교계 사립 영명永明학교로 유학을 보냈다. 기미 독립 만세가 전국으로 파급, 1919년 3월 5일 군산 지방에서 독립 만세 운동이 일어나자 일경은 특히 영명학교 교사와 학생 30여 명을 체포하였다.

 

동년 3월 31일 광주지방법원 군산지청에서 영명학교 4학년생으로서 동향의 동지인 강규언의 재판 방청석에 앉아 있었다. 30여 명의 간수에게 끌려 재판장으로 들어오는 찰나, 특히 동향의 강규언이 모습을 보고 먼저 벌떡 일어서서 대한 독립 만세를 외쳤다. 이어 많은 방청객들의 만세소리로 가득 찼다. 일본으로 건너가 고베신학교神戶神學校에서 학업을 계속하였다. 목사로 안수按手되고 경남 거창居昌, 전남 무안務安, 서귀포, 한림 등지에서 복음 전파에 일생을 바쳤다.

 

특히 거창에서 신악이愼岳伊 여사를 만나 결혼, 전교의 반려자가 되고 제주 한림교회를 맡아 포교에 진력하였다. 1943년 5월에 일제의 강압에 의해 조선예수교 장로회는 해체되고 일본 기독교 조선 교단敎壇으로 흡수 개편시켜 동년 6월 10일에 제주노회濟州老會는 강제로 해산되고 말았다. 결국 강 목사를 미국의 첩자로 몰아 가택 수색 끝에 소장해 온 500권의 서적과 서류 문서 등을 압수해 갔으나 증거가 발견되지 않아 구금할 수 없었다. 광복 후 이승만 대통령은 그 인품을 듣고 제주도지사의 취임을 종용했으나 오직 종교 활동에 여생을 바치기로 하며 거절했다. 한림신사翰林神祠는 일본의 우상을 모시던 곳이니 이를 허물고 이곳에 한림교회를 지어 박애 정신을 몸소 실천하였던 것이다. 1953년 제주대학이 개설되자 종교학 강의를 담당하였다.

 

이 무렵은 6·25 직후라 기독교의 각 종파가 들어와 서로 할거割據하며 갈등이 증폭했으나 오늘의 예수교 장로회長老會의 기틀을 마련하였다. 1966년 제주노회는 재단법인을 설립하고 초대 이사장이 되었다. 그는 문태선 목사와 함께 ‘제주 선교 70년사’를 편저하여 제주도의 기독교사基督敎史를 정립하였다. 정부에서는 1990년 8월 15일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하였다. 또 한림교회 신도들은 1991년 7월 12일 그의 5주기 추도일에 공적비를 교회의 뜰에 건립하여 추모하기에 이르렀다. 비문 내용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1932년 장로교 목사로 안수按手를 받은 후 1942년 한림교회에 부임, 1971년 은퇴하기까지 30년 간 한림교회 원로 목사요, 제주노회濟州老會 공로 목사이다.

 

그는 전북 영명학교·경성京城신학교·일본중앙신학교에서 공부한 최고 지성인으로 청빈한 삶을 실천하고 일제 때 파괴된 일본 신사 터 위에 기독교 성전을 건축하여 유치원·성경구락부 등을 운영하였다. 한림교회 기념비에는 강康목사의 교회사랑·나라사랑·제주사랑의 신앙을 본받고 그의 덕과 사랑을 가슴깊이 되새기며 이 기념비를 세운다.”

 

강민수姜敏洙:1882(고종19)~?, 무오년 법정사 항일운동. 봉기군의 우대장右大將. 경상북도 영일迎日군 창주滄洲면 태생, 불교 스님이다. 산남 도순리<돌숭이>에 살면서 법정사로 옮겨 법정사의 주지 김연일金蓮日을 존경하며 따랐다. 1919년 2월 4일 1년 6월형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강병희姜炳喜:1903(광무7)~1973, 강창보姜昌輔를 탈출하도록 도와준 항일활동. 본관 진주, 강홍빈姜洪彬과 고신생高辛生 사이의 3남으로 제주시 삼양리<설-캐> 태생, 동아통항東亞通航조합 출장소장으로 일하며, 복목환伏木丸에 관계하고 있었다. 항일 운동가 강창보(31, 용담)는 해녀 항일운동의 후견 단체 혁우동맹革友同盟의 실제적인 지도자로 지목되어 1932년 5월 2일 구금되어 있었다. 5월 6일 오전 2시경 유치장을 탈출하는 데 성공, 서귀포 이도백李道伯의 집에 은신 중이었다. 5월 21일 오후 7시경 강병희는 서귀포항 방파제 근처에서 빈 가마니 속에 강창보를 숨기고 끈으로 묶어 ‘복목환 김일성金一成’이라고 적어 한 개의 해산물 짐짝같이 포장하였다. 이날 오후 10시경 당시 서귀포 항구에 정박중인 복목환에 숨겼다.

 

이는 자기가 복목환 제주취급소 책임자임으로 이렇게 은닉할 수 있었다. 보목환 선원 한숙도韓淑度 외 2명에게 이를 인도하여 5월 26일 일본 오사카항으로 상륙하게 하여 도주시켰다. 강병희는 1932년 10월 26일 8월형을 받아 옥고를 치렀다. 1958년 월북하여 1973년 사망했다고 전해진다.

 

※ 필자의 변:1995년 나는 북제주교육장 당시 서무과장<과장 강선수姜璇洙>이 나에게 “선생님이 제주항일운동을 평생 천착穿鑿했으니 부탁드리오니 강병희姜炳喜에 대한 비문을 만들어 달라.”고 요청했다. 그래서 써 주었고 강선수는 붓글씨를 썼다. 이렇게 건비建碑하여 드렸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위의 강병희는 일제로부터 너무나 심한 고통을 받아 옥고를 겪었다. 그는 식민지 고등경찰을 돌로 쳐서 죽였다고 재일 교포 언론인 고준석高峻石(행원)은 증언 기록하고 있다. 이 고등경찰은 우리 애국지사에게 혹독한 고문을 가하였는데 특히 조선어학회 사건을 과대포장하여 유명한 우리 학자에게 고문을 가하여 악명이 높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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