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의 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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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길주. 수필가

늙어 죽는 날까지 사람 속에 파묻혀 사는 사람들이 있는가 하면, 싫든 좋든 혼자 살아가야 하는 사람도 있다. 어떻게 살든 한 생애의 끝은 똑같이 홀로다. 더불어 살 수는 있지만 더불어 죽을 수는 없는 게 인생이다. 어쩌면 혼자 산다는 것은 홀로 떠날 수밖에 없는 죽음 앞에서 언젠가는 선택할 수밖에 없는 삶의 방식일지 모른다.

젊은 시절에는 직장 동료나 이런저런 인연의 사람들과 어울려 산다. 인간관계가 어지러워져서 부담이 되는 경우도 허다하다. 하지만 그것도 생의 한때다. 직장에서 은퇴할 나이가 되면 일과 맺었던 인연이 하나둘 떨어져 나간다. 그 대신 제2의 인간관계가 형성된다. 취미 활동이나 동호회 모임, 등산이나 여행, 우연히 만나는 사람들과의 교류다. 자칫 ‘나의 삶’은 사라지고 관계 의존의 삶에 파묻힐 수도 있다.

요즘은 작은 마을에 사는 사람들이 도시에 사는 사람들 못잖게 복잡한 인연으로 얽혀 산다. 더러 행복해 보이기도 하지만 마지못해 끌려다니는 사람도 있어 안쓰럽다는 생각도 든다. 활발한 인간관계 속의 삶은 만남의 즐거움이 잦을지 모르지만 그 만남이 부담으로 작용하여 삶에 즐거움의 그림자를 드리우기도 한다. 많아야 좋은 것이란 자기 함정에 스스로 옭아맨다. 가정의 대소사에 찾아오는 친지들의 수가 마치 행복지수라도 되는 듯이 ‘남이 보는 나’에 대한 집착이 빚어내는 삶이다.

나이가 들면 외적 인격으로 살아간다는 게 심리학의 한 이론이다. 따분한 자아실현보다는 도발적이고 화려한 삶을 좇게 된다. 인정받고 싶은 욕구나 과시욕의 화신처럼. 그래서 거의 누구나 가면을 쓰고 자신의 삶이 아니라 타인의 삶을 연기하듯이 살아간다. 그 가면을 찢고 맨얼굴이 드러나도록 해야 진정한 자신의 삶을 살 수 있는데.

칼 구스타프 융에 따르면 우리에게는 세 자아가 있다. ‘본질의 나’, ‘남이 보는 나’, ‘내가 바라는 나’가 그것이다. ‘본질의 나’를 외면하고 ‘남이 보는 나’에 집착하면 내 삶의 본질은 사라지고 껍데기만 남게 된다. 내 삶은 누구도 대신할 수 없는데 눈에 보이는 껍데기 삶이 전부인 양 그것들 치다꺼리에 빠져 헤맨다. 행복은 그 씨알을 손수 뿌리고 경작하며 거두어들이는 삶이 차지한다. 혼자 산다는 것은 그런 삶의 추구다. 인간관계에서 얻는 쾌락처럼 짜릿하지는 않지만 소소하고 은은한 행복감으로 내 안을 채워가는 삶이다.

그렇다고 혼자 살아간다는 것이 독신이나 외톨이로 산다는 의미는 아니다. 더불어 살아가는 삶 속에서도 자기만의 고유한 삶의 영역을 확보하여 그 속에서 성취와 자족의 기쁨을 얻으려는 삶의 방식이다.

이런 삶을 지향하려는 사람들이 젊은 세대를 중심으로 늘어나는 추세다. 마지못해 혼자 사는 사람들이 아니라 사회적으로나 경제적으로 살만한 처지에서 자발적으로 혼자 사는 삶을 선택하는 이들이다. 친구 없이 혼자 여행을 떠난다거나 공부나 취직을 위해 혼자 외국으로 나가는 이들, 남이 부러워하는 직장을 버리고 홀로 독립하거나 황혼녘에 졸혼(卒婚)을 선언하는 사람들…. 자신의 삶을 사랑하기에 행복해지기 위해서 누군가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오늘의 나르키소스(Narcissus)들이라고나 해야 할지….

그러고 보면 사람은 한평생 두 가지 삶의 방식을 놓고 갈등하며 살아간다고 할 수 있다. 사람들 틈에 섞여 아옹다옹 살고 싶은, 아니면 독립적이고 개별적이며 독자적인 삶을 살고 싶다는. 이 두 삶의 방식을 어떻게 조화롭게 다스릴 것인가? 결국 ‘사는 게 뭔지’라는 인간의 원초적인 물음과 맞닿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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