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역사를 참고하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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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종 서귀포지사장 겸 논설위원

우리 민족은 고조선 건국 이래 중국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관계를 이어왔다.

고조선 이후 조선시대까지 우리나라는 중국 대륙에서 수많은 나라들이 흥하고 망할 때마다 격변의 소용돌이 속으로 빠져 들었다. 강대국과 인접해 있는 지리적 여건상 불가피했다.

그럼에도 고려시대까지는 비록 광대한 영토와 인구를 가진 중국 대륙을 넘보지는 못했다 하더라도 중국 대륙 국가들이 만만하게 볼 민족은 아니었다.

▲그 중심에는 삼국시대 고구려가 있었다.

고구려는 전한(前漢)이 고조선을 멸망시키고 세운 한사군을 정복하고, 한반도 북부와 만주, 요동 일대에 강력한 제국을 건설했다. 요동까지 영토를 넓힌 광개토대왕은 우리 민족 역사상 처음 연호를 사용하며 정복 군주로서의 위엄을 중국 대륙에 떨쳤다.

수·당의 계속된 침략을 막아낸 고구려는 연개소문이 죽은 후 지배층의 분열로 668년 나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하지만 후세들에게는 위대한 국가로서의 이미지가 강하게 심어줬다. 후삼국을 통일한 고려도 건국 초기 거란과 여진의 침략을 물리치며 자주국가로서의 위상을 확고히 했다.

13세기 들어 고려는 몽골(원나라)의 수차례 침략으로 국토가 황폐화되고 끝내는 원에게 항복했지만 제주도까지 근거지를 옮기면서 끝까지 저항한 ‘삼별초의 항쟁’은 우리 민족의 기개를 보여줬다.

▲이성계가 위화도 회군으로 조선을 건국한 이후 중국에 대한 사대주의는 갈수록 심화됐다.

조선은 독립국가였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간섭을 받았다.

새로운 왕이 즉위하면 중국(명나라)의 승인을 받았고, 해마다 조공을 바쳤으며 중국과 같은 연호도 썼다. 조선의 왕은 매년 정월 초하루에 중국 황제의 궁궐이 있는 방향으로 절하면서 ‘망궐례’를 올리기도 했다.

그런데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것은 청나라가 침입한 병자호란 때 인조가 남한산성에 피신해 있으면서도 명나라 황제가 있는 베이징을 향해 망궐례를 올렸다는 사실이다.

청나라 군사 12만명이 남한산성을 포위하고 있는데도 척화파·주화파는 끝까지 싸우느냐 항복하느냐를 놓고 난상토론을 벌이고, 인조는 남한산성으로 도망친 상태에서도 나라의 흥망이나 백성들의 안위보다 망해가는 명나라 황제의 생일이 중요했던 모양이다.

▲문재인 대통령이 13일부터 중국 방문에 나섰다.

사드 문제와 북한 도발 및 한미훈련 동시 중단이라는 ‘쌍중단’ 압박 등의 난제들을 극복하고 당당한 한·중 관계를 구축하길 바라마지 않는다.

역사에서 배운다는 말이 있듯이 우리 역사를 참고하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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