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0년대 지금의 목관아지 자리에 있었던 제주경찰서의 모습. 이 건물 왼쪽에는 사이렌탑과 그 아래에는 하마비가 있었고, 왕벚꽃길을 따라 제주경찰국, 바로 옆에는 법원과 검찰이, 오른쪽에는 옛 우체국이 있었다. 1960년대 관덕정 일대에는 제주시청을 비롯한 제주경찰국, 제주지방법원, 검찰청 등 주요 관공서가 모여 있었다. 1970년 도청, 경찰국 등 일부 기관이 신제주로 옮기며 관덕정 시대를 마감했다. 또 관덕정 광장은 1970년대 중반까지 국경일 기념식 등 주요 행사가 열리는 장소로 이용됐다. <출처: 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강이천姜彛天:1768(영조44)~1801(순조1), 천주교인. 학자. 유배인. 본관은 진주. 자는 성륜聖倫, 호는 중암重菴. 아버지는 강완姜完이다.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에 입학했다.


1797년 돈녕부도정敦寧府都正 김정국金鼎國에 의하여, 주문모周文謨와 접촉하면서 천주교 교리를 배우니, 요언妖言으로 민심을 혼란시킨다고 보고되어 형조의 탄핵을 받아 그해 11월 제주목에 유배되었다.


1801년(순조1) 신유박해 때 옥사하여 주문모와 함께 효수되었다.

 

저서로는 고증적 자료가 다수 수록된 ‘중암고’ 8권 4책이 있다.

 

1779년(정조3) 12세 되던 해부터 임금의 총애를 받고 궁궐에 출입하면서 응제시를 지어 올렸다.


▲강이철康履綴:1809(순조9)~1890(고종27), 무신. 정의현감. 본관은 신천, 자는 맹오孟吾, 정의현감을 역임한 강연康綖의 아들로 조천면 신촌리<숙군>에서 태어났다.

 

헌종 때에 무과에 급제, 앞서 1841년(헌종7) 조천방호소 조방장을 역임하였다.


명월진 만호를 역임한 강이철은 전 정의현감 강이호康履昊의 아우로서 철종 때에 김기행金沂行의 후임으로 정의현감에 도임하였다. 


1847년(헌종13) 10월에 성첩 및 관청을 크게 보수하게 될 때 임무를 담당하는데 이덕우, 이형눌, 전 만호 김기행金沂行, 명월만호 강이진康履鎭은 무기를 담당하고 전 현감 정귀룡鄭貴龍, 전 만호 강이철은 성첩과 관아의 보수를 담당하였다.

 

동년 7월부터 시공하여 1847년 10월에 완공하였다.

 

이때 관아로는 망미루望美樓를 새로 짓고 풍우뢰우단風雨雷雨壇, 객사, 남수구, 남병문, 중원문中轅門, 객사대청, 연무정, 동·서·남문루 등을 개건하였다.

 

   
▲ 만호 강후이호 추사비追思碑.

▲강이호康履昊:1798년(정조22)~1850(철종1), 무신. 정의현감. 자는 의서義瑞, 본관은 신천, 정의현감을 역임한 강연康綖의 아들이다.


1847년(헌종13) 12월 30일, 정의현감으로 발령되자 1848년(헌종14) 2월, 이동규李東奎의 후임으로 도임하고 동년 6월에 떠났다.


강이호는 1829년(순조29) 10월, 무과 병과丙科로 합격하였다.


앞서 1848년(헌종14) 4월 25일 정의현감 강이호康履昊와 수산진 조방장 김기찬金沂燦의 치보 및 수산봉 별장 고한명高漢明·협재연挾才烟 별장 오사득吳士得 등이 보고를 종합해 보니 일본 선박이 방두포(현 신양포) 근처에 머물었다는 것이다.

 

1837년(헌종3) 7월, 명월진 수군만호로 발령되어 1840년 1월 20일 임기가 만료되자 퇴임.


만호로 재임시 스스로 물력을 들여 관청 건물을 대수선하니 제주목사 이원달李源達이 이를 높이 평가, 포상 상신의 장계를 올렸다.


1841년 6월 부호군 및 오위장으로 발령, 이듬해 2월에 아우 이구履榘가 명월만호로 도임하고 ‘만호강후이호 추사비’를 건립, 본시 명월성 안에 있던 이 비는 현재 신제주 남쪽 해군 제9506부대 교육장 앞 도로변으로 옮겨져 있다.


이들은 일본 평호도平戶島 사람으로 5명이 타서 고래잡이 나왔다가 이날 이곳에 표도하였다.


선두는 전중정사랑田中情四郞이었으며 5월 8일 출항되었다.


▲강익주姜翊周:1712(숙종38)~1764(영조40), 대정현 선비. 종묘서봉사宗廟署奉事.

 

그는 유배인 심내복沈來復의 역모에 연루되어 임금의 친국을 받았고, 본시 안덕면 감산리<감-미>의 사람으로 종묘서봉사로서 기상이 호탕하여 ‘억센 강별장’이라는 별칭을 갖게 되었다.


1763년(영조39) 7월에 발각되어 심내복과 연루자 전원을 서울로 압송할 때 조영득趙榮得의 두 아우와 대정 사람 강익주, 또 강익주의 딸 월중매月中梅(조영득의 첩) 등도 연루되어 서울로 압송되자 임금으로부터 친히 국문을 받았다.


결국 강익주는 형장으로 맞아 죽고 1763년(영조39) 11월 강익주의 딸 월중매는 흑산도로 유배되어 종으로 생활하였다.


대정현 감산리에 사는 강익주는 유배인 심내복과 서로 어울리는 사이로 자주 강익주 댁에서 바둑 두기가 일쑤였다.

 

어느 날 심내복이 몰래 흑심을 품어 강익주의 사비私婢를 간음한 관계로 강익주로부터 미움을 받고 욕을 당한 바 있었다.

 

마침 심내복 역모사건에 강익주와 강익주의 딸 월중매도 연루되어 서울로 압송 친국을 받았다.

 

한을 품고 있었던 심내복은 죽을 바에야 강익주를 끌어들여야겠다고 여겨 형관에게 부풀려 일러 바쳤다.

 

   
 

▲강인수姜仁秀:?~1948, 미 군정기의 경찰행정가. 전라남도 태생. 일제강점기 조선총독부의 경부警部, 광복 후에 경찰 간부.


1939년 전남 여수경찰서 경부보警部補를 거치는 동안 조국이 해방되었다.

 

경찰학교 감찰관으로 있다가 1947년 2월 20일에 초대 제주경찰감찰청장.


앞서 3월 31일자로 청장 강인수는 전남 지방으로 전출되고 후임 청장으로 김영배金英培(서울대 사무국장)가 부임하였다.


강인수는 1948년 10월 19일 여수麗水의 육군 제14연대의 반란사건으로 순천順天에서 반군에 의해 피살되었다.


1946년 5월 제주경찰서장으로 3개월 재임하고 동년 8월 1일 도제道制 실시로 동년 9월 제주경찰서가 제주감찰청으로 승격되어 동년 12월에 초대 청장 신우균申宇均이 부임하였다.


신청장이 당시 ‘복시환福市丸사건’이란 독직瀆職사건에 관계되어 1947년 2월 20일 직위 해제, 그 후임으로 강인수 감찰관(국립경찰전문학교 총무과장)이 동일자로 발령받았다.

 

충북, 충남 관내의 경찰관 50명을 제주로 파견하였다.


동년 3월 9일 제주감찰청이 제주경찰감찰청으로 개편되면서 초대 청장으로 부임한 것이다.


신임 강인수 제주도감찰청장은 착임 제일성으로 “제주를 떠난 지 반년 만에 다시 오게 되니 감개무량하다.

 

실은 2월 20일 돌연 경무부로부터 명령을 받아 부임하였으나 앞으로 명령이 있을 때까지는 전직인 경찰전문학교 총무과장과 본도 감찰청장을 겸임하게 되리라고 본다.


제주경찰에 관해서 내가 중앙에서 들은 바에 의하면 아마도 나의 본도 경찰 재직 시에 비해서 다소 규율이 문란된 것 같이 보인다.

 

이에 대해서는 경찰학교 교관인 김계중金啓重 경감과 동 박계현朴桂炫 경사가 경무부의 명령으로 왔는데 이들은 앞으로 나의 직무를 보좌함과 동시에 제주경찰의 규율쇄신에 전력을 경주하게 될 터인데 특히 3월 1일 계기로 경찰의 완전한 퇴세환회頹勢換回를 기할 작정이다.”라고 말했다.


또 2월 23일 민주주의민족전선 제주도위원회(위원장 안세훈)가 결성되면서 3·1절 기념투쟁 제주도위원회에서 시위운동을 일으켰다.


동년 3월 1일 시위 군중 7명이 경찰의 발포로 사망, 이에 항의하는 뜻으로 3·1절 투위鬪委에서는 3월 12일을 기해 관공서 총파업을 단행하였다.


미 군정청은 동월 20일 총파업 주모자 150명을 검거하고, 발포 경관인 순경 이문규李文珪는 파면되었다. 당시 제주경찰서장 강동효姜東孝는 발포 책임으로 파면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