새해에는 바로 봅시다
새해에는 바로 봅시다
  • 제주신보
  • 승인 2018.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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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진건, 제주대교수 교육학 전공/논설위원

작년에 뜻 깊은 자리가 있었다. 고교동창들끼리만 모여 이른바 ‘환갑반창회’라는 것을 했던 것이다. 환갑에 집안잔치를 벌이던 예전과 달리 요즘은 그냥 넘어가는 것이 상례가 되었지만 그러나 우리 동창들끼리라도 그동안 열심히 살아 온 것을 서로 격려해주자고 1박2일 동안 모였던 것이다.

때가 되어 제주나 부산에서도 올라왔고 멀리 캐나다로부터 날아온 친구도 있었다. 술과 노래는 당연한 순서였지만 그전에 주제 강연도 하고, 몇 명이 지난 삶을 들려주는 기회도 갖고, 심지어 공연까지도 하며 정말 재미있고 의미 있는 시간을 보냈다.

환갑반창회를 끝내며 우리는 노노족이 되자고 약속했다. 노노족이란 영어 ‘노(No)’와 한자 ‘노(老)’를 합성해 만든 신조어로 ‘늙지 않는 노인’ 혹은 ‘늙었지만 젊게 사는 노인’을 말한다. 그러기 위해서 운동과 식생활 관리는 물론 여행과 취미활동도 열심히 하자고 했다. 그러나 무엇보다 아집을 버리자고 약속했다.

나이가 들어가면 자기중심에 빠져 다른 사람의 입장을 고려하지 않는 경우가 많아진다. 그것이 바로 아집이다. 아집과 고집은 다르다. 고집은 자신의 의견을 굽히지 않는 부정적인 측면이 있지만 신념이나 투철한 관점을 지키는 긍정적인 면도 있다. 그러나 아집은 온전히 부정적이다. 고집에는 어느 정도 보편성과 공감대가 있다면 아집에는 그런 것이 전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집은 독선과 일맥상통한다.

추사 김정희는 9년의 제주유배생활을 하는 동안 많은 시를 남겼다. 하지만 늘 대하던 단산(簞山)에 대해서는 놀랍게도 한편도 없다. 단산은 그 생김이 날카롭다. 그래서 추사체도 그 영향을 받은 것이 아닌가 여겨질 정도이다. 단 한편의 시도 없다니 필자는 찾고 또 찾다가 추사의 <포사하기 위해 오대산에 오르다(曝史登五臺山)>라는 시를 단산에 대한 것이라고 고집하게 되었다.

그렇게 고집했던 이유는 이원조 제주목사가 엮은 『탐라지초』의 대정현 산천편에서 단산을 오대산이라고도 한다고 했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것을 읽는 순간 환호하며 박수를 쳤다. 사실 단산 아래서 9년을 살면서 추사의 감수성에 시 한편쯤은 능히 남겼을 만하다는 생각이 강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아쉽게도 그 시는 단산에 대한 것이 아니었다. 그 오대산이 그 오대산이 아니었던 것이다. 이 시는 추사 김정희가 젊은 시절 포사관이 되어 강원도 오대산을 찾았을 때 쓴 것이었다. 포사관이란 사고에 있는 책을 꺼내 햇볕을 쬐며 바람을 통하게 하는 일을 맡은 관리이다. 순간, 필자는 실망이 컸고 그냥 대정의 단산에 대한 시라고 고집할까도 싶었다.

자칫하다가 자기중심의 판단에 빠져 추사의 시를 제멋대로 해석할 뻔 했던 것이다. 아집에 빠졌다면 당연히 바보짓을 했을 것이다. 그러기에 시인 김수영은 “동무여, 이제 나는 바로 보마 / 사물과 사물의 생리와 / 사물의 수량과 한도와 / 사물의 우매와 사물의 명석성을”이라며 사물을 바로 볼 것을 요구했던 것이다.

단산과 오대산은 전혀 다른 사물일 텐데 그것을 바로 보지 못했으면서 마치 제대로 본 것처럼 주장할 뻔 했으니 얼마나 낭패였겠는가. 나이가 들어갈수록 사물을 바로 볼 줄을 알아야 한다. 바로 보았다고 주장하다가도 그것이 틀렸음을 알았을 때는 인정하고 고칠 줄 아는 것이 고집이라면, 그것이 틀렸음에도 인정하지 않고 바로 보았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집이다.

우리 사회는 아집이 팽대해 있다. 특히 정치권은 그 정도가 심하다. 2018년은 개인은 물론 우리 사회 전반이 사물을 제대로 보며, 부디 아집을 버리고 일신우일신(日新又日新)의 날마다 새롭고 날마다 젊어지는 새해가 되길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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