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렴
토렴
  • 제주신보
  • 승인 2018.01.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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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재봉, 환경운동가/수필가

바람이 매섭다. 특히 제주도의 겨울바람은 두꺼운 외투를 벗긴 듯 체감온도를 내려버린다. 해안 길을 따라 달렸다. 흰 파도가 으스스한 기운을 방파제 위로 넘기며 위협한다.

따뜻한 국물이 마시고 싶었다. 봉사 활동을 끝내고 돌아가는 여섯 일행들 모두 같은 마음일 게다.

주차장이 한적한 국숫집으로 들어갔다. 점심때가 조금 지난 시간이어서 식당 안은 한산했다. 볼살이 통통하게 오른 얼굴로 맞아주는 여자 주인장의 미소 속에 맛있는 국수가 나올 것 같다.

벽에 걸린 차림표로 모두의 눈이 쏠린다. 열무국수, 냉국수, 콩국수. 보기만 해도 춥다. 얼른 눈을 차림표 아래쪽을 더듬는다. 멸치국수, 고기국수, 칼국수. 실감 나게 김을 모락모락 나는 그림까지 곁들였다. 몸이 훈훈해지는 느낌이다.

주방도 주인의 흰색 위생복만큼 깔끔하다. 삶아놓은 국수 타래를 김이 퐁퐁 솟아오르는 찜통 속에서 연신 토렴을 해댄다. 그렇게 준비된 국수 그릇에 국수 꾸미를 넣고 우리 앞에 다소곳이 놓였다.

국수 양에 비해 커다란 그릇이 안정감을 준다. 그릇을 손으로 감싸니 토렴 잘된 내용물처럼 따뜻하게 전해주는 온기에 시렸던 손마저 풀려갔다.

소리가 일품이다. 남자는 후루룩, 여자는 호로록, 흡인력이 달라서일까, 베어 무는 양이 달라서일까, 다른 소리로 화음을 맞춘다. ‘두 사람 더 있었더라면 한 옥타브를 이루어 연주도 해볼 것을’ 하며 속마음으로 미소를 머금고 바라보았다.

여주인이 그릇 하나를 들고 다가왔다. 부족하신 분은 더 드시라며 그릇 하나 가득 덤으로 가져온 국수를 잽싸게 채가는 욕심 많은 손, 그렇게 체간 국수를 국자 한가득씩 떠서 옆 사람, 앞사람 그릇으로 비워 넣는다. 그런 모습에 더 훈훈해지는 우리다.

주인 여자가 곁들여 나왔던 돼지고기 수육을 바라보더니 도로 가져간다. 체에 넣고 뜨거운 국물에 다시 토렴한다. 할머니 마음에 어머니 손 같다.

따뜻해진 수육이 주인장 마음 같아서 입안이 행복하다. 깍두기도 맛있고, 김치도 맛깔스럽다.

차에 오른 일행들이 한마디씩 배부른 소리 한다. “다시 또 와야겠어, 맛도 좋고 주인이 맘에 드네.”

나도 한마디 거들었다. “국수 다발 토렴하듯 우리도 국숫집에 토렴되었구나. 장사 잘되겠어.”

우리의 일상이 추운 겨울 삶일 때가 많다. 속상하고, 화나고, 불만스럽고. 그럴 때마다 포근하게 보듬어 주는 손길과 마음이 있어 활기를 찾는다.

국수 다발이나 찬밥을 토렴하듯 가족이나 벗, 인척이나 이웃이 있어 피곤한 생활에 활력을 찾는 것이다. 행복한 삶이지 않은가.

우리 주변에 토렴이 필요한 이웃이 없는가, 돌아 봐야 할 연말연시다.

내 작은 관심 하나가 귀한 생명까지 보듬어 줄 수 있다면 행복한 사회가 되겠지.

구세군의 종소리에 고사리손이 반응하고, 청년들이 둘러맨 쌀 포대가 독거노인 집으로 들어가는 것이 보이는 때다.

따뜻하게 토렴 되어 추운 겨울 떨고 있었을 마음이 온기로 가득했으면 좋겠다.

눈총 받는 거액의 건물과 과오로 빗어진 일부 봉사단체의 부정, 어린 자식이 환자라는 명목으로 십수 년을 기부 받은 아빠. 거액을 사욕으로 사용한 그 사람이 빗어낸 과오로 덜 따뜻한 연말연시라고 한다.

토렴된 하얀 김이 추위를 물리칠 것 같은 한겨울인데, 그처럼 세상이 따뜻해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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