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4·3 당시 수백여 명의 양민들이 서귀포시 표선면 한모살에서 학살당했다. 12일 현재 표선도서관 입구 공터에 있는 4·3유적지 안내판만이 그날의 비극을 설명할 뿐이 다. 이마저도 오는 7월 끝나는 도로 확장 공사로 사라진다. 안내판 너머로 공사자재 모습이 보인다.

 

전날에 이어 내린 눈으로 12일 오후 서귀포시 표선면 표선리의 거리는 온 세상이 하얗게 변해 있었다. 인근 표선해수욕장 백사장도 바다를 접한 일부를 빼고는 하얀 눈으로 뒤덮였다. 그 위로 아이들이 부모님과 함께 해맑게 웃으며 썰매를 끌면서 뛰어놀았다. 연인들도 눈사람을 만들며 즐거운 한때를 보내고 있었다. 근처 대형 리조트로 차를 몰고 가던 관광객들은 길 한 편에 줄지어 차를 세워두고는 하얗게 변한 아름다운 백사장을 배경으로 사진을 찍었다.

 

백사장 바로 맞은편 표선도서관 입구 공터에 있는 조그마한 ‘4·3유적지-한모살’ 안내판만이 눈 속에서 홀로 그날의 비극을 설명하고 있을 뿐이었다.

 

 

■총알 아끼려 일렬로 총살

 

지금의 표선해수욕장 서쪽은 과거 ‘당캐’ ‘한모살’ 등으로 불리며 넓은 모래사장이 펼쳐진 곳이었다. 지금은 표선도서관, 제주민속촌, 해비치 리조트와 식당가가 들어서 있다.

 

4·3 당시에는 표선면 가시리·토산리, 남원면 의귀리·한남리·수망리 중산간 주민들이 군 당국에 의해 일상적으로 희생됐던 총살장이었다.

 

토산리민 200여명이 총살당했는가 하면, 세화1리 청년들이 “무장대 토벌 가자”는 군인의 명령에 따라나섰다가 한꺼번에 16명이 희생되기도 했다. 이곳에서는 이처럼 대규모 집단총살뿐만 아니라 간간이 주민 한두 명이 끌려 나와 총살되는 등 거의 하루도 거르지 않고 총살이 이어졌다. 또 모래사장이 넓게 펼쳐져 있어서 특정한 곳이 아닌 백사장 이곳저곳에서 총살이 집행됐다. 

 

이곳이 수많은 주민들이 희생당한 총살장이 된 것은 당시 표선면사무소(현재 제주은행 표선지점 자리)에 군부대가 상주했기 때문이다. 육군 2연대 1대대 2중대의 1개 소대가 주둔했다. 면사무소 앞에 임시로 움막을 지어 유치장으로 활용했는데, 끌려온 주민 대부분이 표선 백사장에 끌려가 희생됐다. 이날 표선리 경로당에서 만난 금창봉씨(77)의 머릿속에도 그날의 기억이 깊이 새겨져 있었다. 금씨는 당시 8살이었다.

 

“학교 가는 길에 면사무소 앞을 지날 때마다 위병소에서 보초를 섰던 군인들에게 경례했었어. 그 군인들이 중산간 양민들을 폭도라고 해서 백사장에 데려다가 죽였지. 한 사람씩 총을 쏜 게 아니라 총알 아끼려고 일렬로 세워다가 한꺼번에 총살했던 게 기억나. 끔찍했지.”

 

 

   
▲ 4·3 당시 군부대가 상주했던 제주은행 표선지점 자리.

억울하고 또 억울해

 

이곳 표선 백사장에서는 토산리 주민들이 가장 많은 목숨을 잃었다. 본래 1948년 11월 중순께부터 중산간 마을을 중심으로 시작된 강경진압작전 당시 토산리는 진압군의 주목을 받지 않은 마을이었다. 알토산(토산2리)은 해변마을이고, 웃토산(토산1리)이라고 해봐야 불과 2㎞ 남짓한 거리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11월 다른 지역 중산간 마을에 내려진 소개령도 이 마을에는 해당되지 않았다.

 

그러던 중 12월 12일 군인들은 어쩐 일인지 웃토산 주민들에게 알토산으로 소개하도록 명령했다. 소개는 한 사람의 희생도 없이 무사히 진행됐다. 웃토산 주민들은 알토산 주민들의 집 마구간 등에 얹혀서 살았다.


그런데 소개 직후인 12월 15일 밤 느닷없이 군인들이 주민들을 모두 향사(현재 토산2리사무소 인근)에 집결시킨 후 18세부터 40세까지의 남자들을 분리했다. 또 여자들에겐 달을 쳐다보라고 한 후 20세 미만의 젊고 예쁜 여자들을 분리했다. 군인들은 이들을 당시 수용소였던 표선국민학교로 끌고 가 감금했다.

 

이후 남자들은 12월 18일과 19일 양일에 걸쳐 표선 백사장에서 총살했다. 여자들은 몹쓸 짓을 당한 후 며칠 뒤에 같은 곳에서 희생됐다. 이 기간 목숨을 잃은 토산리 주민만 200여명에 달한다. 당시 토산리는 200호 규모의 작은 마을이었다. 이날 이후 토산리는 청년이 없는 마을이 됐다.


이날 토산2리 노인복지회관 인근 자택에서 만난 정의문씨(88)의 경우 운 좋게 죽음을 피할 수 있었다.

 

“나이는 18살이었지만, 호적 나이로 16살로 돼 있어서 다행히 살았어. 우리 작은 형님도 운 좋게 살았지. 군인들이 마을 사람들을 불러 모은 날 건강이 좋지 않아서  (그 당시 소개돼 살고 있던) 마구간에서 안 나갔거든. 군인들이 죽창으로 툭툭 치면서 나오라고 해도 ‘곧 죽을 거’라고 하니깐, 그냥 내버려 두더라고. 그래서 살았어. 그 이후로 지금까지 살고 있는데, 우리 큰형님만 20대라는 이유로 죽었지.”

 

   
▲ 김은순(사진 왼쪽)씨와 정의문씨는 지난 12일 기자와 만난 자리에서 4·3 당시 아픈 기억을 증언했다.

정씨는 이듬해 같은 마을 사람이던 김은순씨(86)와 결혼해 지금까지 토산2리에 살고 있다.


김씨의 큰언니도 정씨의 큰형이 끌려간 날 함께 끌려갔다가 목숨을 잃었다. 당시 김씨는 16살이었다. 곁에서 정씨의 말을 듣고만 있던 김씨가 갑자기 말을 꺼냈다.

 

“멀쩡히 농사짓고 살던 마을 사람들한테 갑자기 ‘안 내려가면 빨갱이’라고 하면서 살던 집 다 불태우고. 알토산에 (강제로) 내려가 살면서도 쌀 한 톨도 안 줘도 아무런 군말 없이 조용조용 지내던 사람들인데 왜 죽였는지…. 군인들 시키는 대로 했는데 왜 죄 없는 사람들을 죽이나. 왜 우리 언니가 죽어야 하는가. 왜 우리 언니가 억울하게 죽어야 하나…”

 

김씨는 당시 끔찍했던 기억이 생각났는지 오랜 세월 참고 참았던 울분을 토해냈다.

 

 

완전히 사라지게 될 한모살


한모살은 시간이 흐르면서 과거의 모습을 잃었다. 더는 수많은 사람들의 한이 서린 모래사장은 없다. 1987년 2월 제주민속촌이 지어진 이후로 해비치 리조트, 식당들이 들어서면서 제주의 대표적인 관광지로 변했다. 여름이면 이곳에는 다채로운 축제가 열리고, 해수욕을 즐기러 온 관광객들로 북적인다.

 

한모살 학살터 가운데 유일하게 개발되지 않았던 표선도서관 입구 공터와 4·3 안내판도 올해 7월이면 사라진다. 지난해부터 서귀포시에서 관광지 교통 혼잡을 해소하기 위해 진행 중이던 ‘표선민속 관광지’ 진입로 확장 공사가 마무리되기 때문이다. 앞으로 더 많은 사람들이 이곳을 오가게 된다.


이날 오후 표선해수욕장을 떠나며 끝없이 펼쳐진 수평선을 바라보았다. 70년 전 죄 없는 사람들은 이 풍경을 바라보며 억울하게 죽임을 당했을 것이다. 4·3 70주년을 맞은 올해 한모살의 비극은 이곳에서 자취를 감춘다. 현재 4·3의 전국화, 세계화를 떠들고 있는 후손들이 과연 4·3을 제대로 기억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