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70년 전 핏빛으로 물든 폭포…지금도 울음 쏟아내다
(6)70년 전 핏빛으로 물든 폭포…지금도 울음 쏟아내다
  • 좌동철 기자
  • 승인 2018.02.0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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軍 서귀포초 머물며 연일 토벌전…248명 숨진 학살터 안내문도 없어
“부모 죽인 이유 아직도 몰라”…“위령성지 조성해 화해 이뤄야”
‘동광 큰넓궤 피난’ 어린이도 죽임…영화 ‘지슬’서 당시 비극 담아
▲ 4·3 당시 248명의 산남지역 주민들이 집단 학살 당한 정방폭포와 소남머리 동산(왼쪽 절벽).

23m 높이의 절벽에서 물이 떨어지는 정방폭포는 동양에서 유일하게 바다로 직접 떨어지는 해안폭포이다. 눈이 시리도록 아름다운 이곳은 70년 전 핏빛으로 가득 찼던 산남지역 최대의 학살터였다.

잡혀온 사람들은 서로 끈으로 묶여 절벽 앞에 세워졌다. 맨 앞 사람을 총으로 쏘아 떨어뜨리면 그 무게로 연달아 사람들이 바다에 주르르 떨어져 익사했다.

토벌대는 총알을 아끼려고 이 같은 짓을 저질렀다.

고태춘씨(당시 32세) 부부는 어린 두 딸을 각각 등에 업은 채 총살당했다. 아이들도 차디찬 바다에 수장됐다.

모두 248명이 정방폭포로 끌려가 죽임을 당했다. 그러나 지금껏 위령비는 물론 안내문조차 세워지지 않았다. 희생자 유족들은 정방폭포가 피눈물을 쏟아내는 것 같다고 했다.

▲왜 집단 학살터가 됐나=서귀면 서귀리(현 송산동)는 산남의 중심지였다.

서귀포경찰서가 있었고, 서귀포면사무소는 2연대 1대대 본부건물로 사용됐다. 서귀포초등학교는 1대대 6중대 병력의 주둔지였다.

면사무소 옆 건물은 1대대 2과(정보과)에서 취조실로 사용했다. 죽음을 넘나드는 혹독한 구타와 고문으로 비명소리가 연일 끊이질 않았다.

수감자가 넘쳐나면서 일제시대에 운영됐던 전분공장과 단추공장 창고는 수용소로 이용됐다.

산남지역 토벌 주력부대가 있는 서귀리에 끌려오면 혹독한 취조에 이어 즉결 처형자로 분류돼 살아서 돌아가기가 어려웠다.

비단 서귀면, 중문면 일대뿐만 아니라 남원·안덕·대정·표선면 주민들도 관할 지서를 거쳐 이곳으로 이송됐다.

바다로 떨어지는 절벽이 있는 정방폭포 상단과 소나무가 많다고 해서 명명된 ‘소남머리’ 동산, 자구리해안 등 해안선 절벽은 4·3당시 집단 학살터로 변해버렸다.

임신한 한 여인은 절벽에서 구르다가 소나무에 걸려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다.

도순리 한 주민은 총알이 빗겨가서 간신히 살아남은 후 마을로 도피했다. 하지만 다시 붙잡힌 후 이곳에 두 번이나 끌려가서 죽임을 당했다.

1948년 11월 7일 군인들은 서귀리 마을을 습격해 민간에 방화를 한 무장대를 쫓아 서홍리 입구까지 갔으나 더 이상 진입하지 못하고 철수했다.

군인들은 서귀포초등학교와 면사무소에 머물며 연일 토벌전에 나섰다. 토벌대의 틈바구니에 끼어 숨죽이며 살아가던 산남 주민들은 공포에 떨어야 했다.

1948년 11월부터 1949년 1월까지 해안 절벽에선 피비린내가 진동하는 대량 학살이 자행됐다.

 

 

▲ 4·3 당시 정방폭포 및 소나머리 해안 절벽에서 가족이 희생당한 유족들. 왼쪽부터 임평조씨, 오순명 정방4·3희생자유족회장, 오찬수씨, 김성도 4·3유족회 서귀포시지부회장.

▲한 맺힌 증언들=하효마을이 고향인 오순명 정방4·3희생자유족회장(72)은 “어머니는 월라봉 인근을 가다가 서북청년단에 의해 희생됐다.

이어 15일 뒤 집에 있던 아버지가 정방폭포로 끌려가 죽임을 당했다. 군인들이 왜 부모를 죽였는지 지금도 이유를 알 수 없다”고 흐느꼈다.

오 회장은 “큰아버지가 부친의 시신을 찾으면서 부모를 한 무덤에 합장하게 됐다. 고아로 커오는 동안 빨갱이 새끼라고 놀림을 받을 때가 가장 서러웠다”고 회고했다.

임평조씨(76·동홍동)의 아버지는 소남머리 동산에 끌려가 처형된 후 시신은 절벽 아래로 던져졌다.

임씨는 “군인들이 아버지를 연행하려고 하니 마을이장은 ‘법 없이도 살 사람이니 풀어줘야 한다’고 변호를 해줬다. 풀려날 수 있었는데 이웃사람이 밀고를 했다. 서홍동 야산에 숨어 있는 무장대에게 장작 한 짐을 날라서 준 게 내 아버지라고 해코지를 했다. 밀고한 그 이웃사람은 풀려났고, 결국 내 아버지는 총살을 당했다”고 말했다.

임씨는 “당시 무장대에 협조를 안 해도 살아남기가 어려웠다”며 “살기 위해 장작을 한 다발을 갖다 준 것도 죄가 되는 세상이었다”며 설움을 토로했다.

4·3당시 15살이던 오찬수씨(84·동홍동)는 기억이 생생하다. “농사를 짓던 둘째형은 서귀포경찰서에서 조사를 받은 후 면사무소 창고에 수용됐다. 큰형은 경찰서 급사로 있었지만 잡혀간 둘째형이 풀려나질 못했다. 결국 정방폭포에 끌려가 총살을 당했다”고 회고했다.

당시 오씨의 어머니는 사람들에게 부탁해 새벽녘에 아들의 시신을 수습했다. 밭에다 몰래 가매장을 한 후 3년이 지난 후에야 무덤에 안장했다.

김성도 4·3희생자유족회 서귀포시지부회장(69)는 “정방폭포와 소남머리 사이에 있는 해안 절벽은 아름다운 비경을 자랑하지만 70년 전에는 아비규환의 학살터였다”며 “248명이나 억울하게 희생됐지만 행정당국은 안내판조차 세우지 않고 유적지 터에 서복전시관을 조성하는데 모두 줘버려다”고 한탄했다.

김 회장은 “ 4·3 70주년을 맞아 산남지역 최대의 학살터에 평화인권 교육장과 위령성지를 조성해만 진정한 상생과 화해를 이뤄낼 수 있다”고 강조했다.

 

 

▲ 1948년 서귀면사무소(현 서귀포자치경찰대)에 주둔한 육군 2연대 장병들이 무장대를 토벌한 기념으로 한라산에서 캐내 옮겨 심은 먼나무. 도기념물로 30년 넘게 지정됐던 이 나무는 2005년 문화재에서 해제됐다.

▲3살 아이까지 희생=안덕면 주민들의 비극은 2012년 상영된 영화 ‘지슬-끝나지 않은 세월2’에서 보여주고 있다.

안덕면 동광리 도너리오름 기슭에 위치한 ‘큰넓궤’(큰 동굴)에는 2개월동안 양민들이 피신해 있었다.

연일 계속되는 토벌로 굴은 발각됐고, 더 깊은 산중으로 피신하려는 주민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주민들이 밤새워 오른 곳은 한라산 영실 부근 ‘볼레오름’이었다.

그러나 한겨울에 쌓인 눈 위에 난 발자국 때문에 곧바로 토벌대에 붙잡혔다.

중문 주둔군에 붙잡힌 56명의 안덕 주민들은 정방폭포로 끌려갔다. 남녀노소 가리지 않고 처형됐다. 아기를 품 안에 앉은 아녀자도 마찬가지였다.

정방4·3희생자유족회에 따르면 안덕면지역 56명의 희생자 중 3살 아이로는 부태근·강홍필이 명단에 올랐다. 이 아기들은 부모 품에 안긴 채 절벽에서 함께 떨어져 목숨을 잃었다.

안덕면 동광리 큰넓궤 피난민 56명 중 정방폭포 바다에 수장된 10살 이하의 남녀 어린이는 10명(18%)에 이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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