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0)노꼬메 오름은 불타는 마을을 속울음하며 지켜봤다
(30)노꼬메 오름은 불타는 마을을 속울음하며 지켜봤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페이스북
  • 제주의뉴스
  • 제주여행
  • 네이버포스트
  • 카카오채널

강학서, 왜정 치하서 유림 단합 앞장…강학수, 정의현감 등 지내
강한종, 흉도 물리쳐 공물 지켜내…강희룡, 유림으로 후진 양성
강희찬, 국회의원 등 역임…계용묵 ‘백치아다다’…제주문학 선도
▲ 애월읍 유수암리에 있는 노꼬메 오름. 오늘날에는 탐방객들로부터 인기를 끌고 있으나, 4·3 당시에는 불타는 마을을 혼자서 속울음하며 지켜봤을 것이다.

▲강학서康鶴瑞:1848(헌종14)~1937(일제강점기), 당시의 정의향교 재장齋長, 정의향교가 폐설廢設되었다가 왜정倭政 치하에서 흩어지는 유림을 단합시키려 노력하였다. 한편 동재東齋에서 오랜 기간 훈학을 하였다.


그는 대한제국 정의향교 재장齋長이었고 향교가 폐교되었다가 복설復設될 때 직원直員이 되어 3차 중임重任되었다.


※(필자의 변): 그의 시, 제목=齋宿 재실에서 밤을 보내며, 朋在遠方來待朝:먼 곳 친구들이 와서 아침을 기다리며/ 一觴一詠樂逍遙:한 잔 들고 한 수 읊고 소요함이 즐겁구나!/ 素王庭下文風動:공자님 사당 뜰에 문풍이 일어나니/ 但願升堂破寂廖:원컨대 많이 배운 이들이 적요함을 깨쳤으면【‘제주풍아’(오문복·2004)】


▲강학수康鶴守:1830(순조30)~1894(고종31), 무신. 정의현감. 호는 민형汶亨, 본관은 신천, 강일록康日祿의 아들로 정의현 천미川尾촌(현 표선면 하천<내끼>) 태생, 1982년(고종19) 무과에 급제하고 이듬해 첨지중추부사가 되었다.


1885년(고종22) 정의현감 및 병마절제도위兵馬節制都尉로 발령되어 방우량龐友亮의 후임으로 도임하였다.

 

▲강한종姜翰宗:1605(선조38)~1668(현종9), 무신. 본관은 진주, 제주시 월평리<다라쿳>에서 강인홍姜仁弘의 아들로 태어났고 1644년(인조22)에 무과에 급제, 경상도 통영의 비포非浦만호를 거쳐 훈련원 판관을 역임하였다.


이 무렵 강한종이 유탁을 치기 위해 출정해 큰 공훈을 세우자 조정에서는 영국원종공신寧國原從功臣으로 봉하고 녹훈과 관복 한 벌, 법전 1편 등을 하사하니, 충훈부忠勳府의 공훈록에 등재되었다.


앞서 강한종을 기리기 위해 그가 태어난 월평리<다라쿳> 한 모퉁이에 추모비석을 세웠다.


묘소는 교래<도리>경에 있다. 그의 아들도 6남이다.


1643년(인조21) 가을 강한종이 특사로 선임되어 수십인의 관속을 거느려 장계와 공물(귤, 전복)을 실어 출륙, 한양으로 가던 터였다.

 

도중에 흉도 등을 만나니 관속들이 모두 도망치려 할 때 그는 이들을 물리치고 귤과 전복을 잘 보전하여 7일 만에 조정에 도달하여 장계와 곡물을 바쳤다.

 

임금은 그의 충성을 가상히 여겨 충의위忠義衛 사과를 제수하였다.


▲강희경姜熙慶:생몰년 미상. 애월읍 유수암리에서 태어나 한학자로서 제주향교 도훈장 반수 등을 역임했다.

 

광복 소식을 전해듣자 ‘聞 自由解放’이라는 유고시도 전한다.

 

4·3 당시 유수암리가 전소되는 광경을 중엄리에서 바라보며 ‘嘆流水岩火亡’이라는 한시를 남겼다.

 

嘆流水岩火亡(유수암이 불타 없어지는 것을 한탄하며)/ 三百餘年先祖鄕(삼백여 년 전에 열린 선조의 고향을)/ 一朝渾入火中亡(하루아침에 불에 의해 망하는구나)/ 暗宵山賊窺强奪(어두운 밤에는 산적이 엿보아 뺏어가고)/ 白日國軍如探囊(한낮에는 국군이 주머니를 털어가네)/ 食糧居屋痕全沒(식량과 집들이 흔적 없이 없어지니)/ 老少生靈心共傷(늙은이 젊은이 할 것 없이 마음을 상케 하누나)/ 流水節山依舊在(흐르는 물과 절산은 옛과 다름없이 있으나)/ 回蘇他日更生光(어느 날에 다시 즐거운 때를 본단 말고) 【‘流水岩誌’(2010)】

 

▲강희룡姜熙龍:1860(철종11)~1927(일제강점기), 한말의 교육자. 자는 운회雲回, 호는 수촌水村. 본관은 진주, 애월읍 유수암流水岩(일명 금덕今德)리에서 강세돈姜世敦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894년(고종31) 한성시漢城試에 합격, 한말 학부의 교원敎員이 되어 후진을 가르쳤다.

 

1896년(건양1) 중국으로 건너가 공자와 맹자의 탄신지인 성지를 순례하고 또 1900년(광무4) 구미歐美 선진 각국을 두루 살피며 자신의 식견을 넓히었다.


그런 인연으로 강교원은 부친의 묘비 비문을 장교원에게 쓰게 하고 글은 평안북도 희천熙川군수 최원순崔元淳(해방 후 제주지방법원장)이 썼다.

 

1905년 수산파 강씨의 강석주姜奭周<금악:거문-오름>와 함께 상경, 농상공부로 찾아가 수산봉<물미-오름>에 있는 선영의 좌전을 문중의 소유로 확정짓는 허가를 받아냈다.


그는 학부의 교원으로 당시 애월읍 곽지리<과물>의 일헌一軒 장성흠張聖欽과 쌍벽을 이루었으며 장교원보다 7년 연상이었다.

 

유림에서는 항상 신우新右면 동부에는 강姜교원, 서부에는 장張교원이라 하여 우러러보았다.

 

▲강희찬姜熹瓚:1938(일제강점기)~1999, 사업가, 정치가, 전국구 국회의원. 본관은 진주. 한림읍 귀덕리 ‘멀-왓’에서 태어나 동국대학교를 졸업, 재일교포인 친형 강순찬姜淳瓚의 후원으로 사업에 힘을 쏟아 융성스텐레스·삼양실업 사장을 지냈다.

 

1992년 민주당 전국구 의원으로 제14대 국회에 진출, 보건사회위원과 예결위원을 지냈다. 또 한일韓日의원 연맹 간사, 한·카자흐스탄친선협회 부회장, 민주당 당무위원, 민주당 북제주지구당 위원 등을 맡은 바 있다.

 

1999년 12월 6일 서울대학 병원에서 지병으로 사망했다.

 

▲계용묵桂鎔黙 :1904(광무8)~1961, 소설가. 6·25 전쟁 당시 제주에 피난 온 문학가.


본관은 수안. 평안북도 선천宣川에서 태어났다.


계용묵은 대지주의 집안에서 태어나 신학문을 반대하는 할아버지 밑에서 한문을 배웠다.


향리의 공립보통학교에 다닐 때 안정옥과 결혼, 졸업 후 몰래 상경해 1921년 중동학교, 1922년 휘문徽文고보에 잠깐씩 다녔으나 그때마다 할아버지에 의해 귀향해야만 했다.

 

4년 동안 고향에서 홀로 외국문학 서적을 탐독하다가 일본으로 건너가 도요東洋대학에서 수학했으나 가산의 파산으로 1931년 귀국했다.

 

1945년 정비석鄭飛石과 함께 잡지 ‘대조大潮’를 발행했고 1948년 김억金億과 함께 출판사 수선사首善社를 창립하기도 하면서 소설 여러 편을 발표했다.

 

1925년 5월 ‘조선문단’ 제8호에 단편 ‘상환相換’으로 등단하고 이래 40여 편의 단편을 남겼다.


1943년 일본 천황에 대한 불경죄로 투옥되기도 하고 또 취직되었으나 일본 사람으로부터 차별적인 대우로 3일 만에 그만두었다.


1950년 6·25 전쟁으로 제주에 피난 온 대표적인 작가로서 당시 월간 ‘신문화新文化’를 제3호까지 발간하고 피난문인들이 환도하게 됐다.

 

그는 1953년 6월 제주에서 순수 문학동인지 ‘흑산호黑珊瑚’를 출간하는 등 성과를 남겼다. 


기념문집 ‘흑산호’는 계용묵의 열의의 결과이며 제주문학 초창기의 디딤돌 역할을 했다. 이를 기리기 위해 1998년 9월 26일 한국문인협회 제주도지회에서는 그들의 발자취가 서려 있는 제주시내 칠성로七星路 옛 동백다방 자리에 ‘현대문학 표징비’를 세웠다.


※(약력) : 본명은 하태용河泰鏞이고, 계용묵은 필명이다. 평북 선천군 남면 출생. 1919년 삼봉공립보통학교 졸업. 1920년 소년지誌 <새 소리>에 시 ‘글방이 깨어져’가 2등 당선. 1921년 중동학교 입학. 조부의 반대로 낙향落鄕. 1924년 휘문고보 입학. 1925년 시 ‘부처님, 검님 봄이 왔네’가 ‘생장生長’지 현상문예 당선. 1928년 도일渡日하여 도요<東洋>대학 동양학과에서 수학. 1935년 ‘조선문단朝鮮文壇’에 단편 <백치白痴아다다>를 발표하면서 본격적인 작품 활동 시작. 1938년 조선일보 출판부에서 활동. 1943년 8월 일본천황 불경죄로 2개월간 수감. 1945년 해방 직후 좌우 문단의 갈등 속에서 중간적 입장 고수. 정비석鄭飛石과 함께 ‘조선朝鮮’ 창간. 1961년 ‘현대문학’에 <설수집屑水集>을 연재 중에 사망했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