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일장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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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이 그리워서 시골장은 서더라’는 장사익의 노랫말처럼, 서귀포 오일장은 정말 사람이 그리웠던가보다. 할 일 없는 바람만 혼자 흙먼지 날리며 들까불던 텅 빈 장마당에, 모처럼 사람들 구름처럼 몰려드니, 오랜만에 주체 못할 활기가 넘쳐흐른다.

구석구석 점포마다에 온갖 물건 쌓이고, 장사꾼들 손님맞이로 분주하다. 그렇지만 결코 목청 높여 손님들을 부르지는 않는다. 그런 자발없는 호객행위는 뜨내기장사치들이나 하는 짓이라는 자존심 때문이다.

오래전 오일장에 삶의 닻을 내린 터줏대감들은 그저 제자리를 지키며 손님을 기다린다. 마냥 멀뚱하게 앉아있기 멋쩍어서 괜히 물건들을 이리저리 옮기고 만지작거리며 바쁜 척 하지만, 기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반가움으로 찾아올 단골손님을 지긋하게 기다리는 것이다.

며칠 만에 한껏 멋 부리고 나온 손님들 역시 시장바닥을 헤매지 않는다. 남루한 가계 때문에 항상 심사숙고를 거치기에, 구입할 물건의 물목들이 머릿속에 또렷하고, 게다가 싸고 좋은 물건을 파는 단골점포가 어디에 있다는 것쯤은 훤히 꿰차고 있기 때문이다. 반면에 미로와 같이 이어지는 장마당에서 길을 잃고 우왕좌왕하는 하는 이들은 나처럼 시장 구경나온 얼뜨기 손님들뿐이다.

대신 자기 점포가 따로 없는 뜨내기 장사꾼들은 하루 종일 호들갑을 떤다. 어떻게든 가지고 나온 물건들을 팔아야하기에 한껏 목청을 높이는 것이다. 이런 이유로 시장 소음의 진원지는 대개 이런 뜨내기 장사꾼들의 자리다.

동네 구멍가게를 뇌사시킨 대형마트들이 바야흐로 오일장의 존립까지 위협하지만, 오일장은 결코 흔들리지 않고 굳건하다. 그도 그럴 것이 오일장은 물건을 사고파는 시장이기도 하지만, 무엇보다 서로를 그리워하는 사람들의 만남의 광장이기 때문이다. 삶의 질곡에 갇혀 나들이 한 번 제대로 못해 격조할 수밖에 없는 서민들이 오일장에서 만나 서로의 안부를 확인하는 것이다. 유독 오일장이 열리는 날에 비 날씨가 많은 것도 노동에서 자유롭지 못한 서민들의 사정을 헤아리는 오지랖 넓은 하느님의 큰 배려가 아닐까.

아내의 눈치를 살피며 내가 매번 오일장 나들이에 따라나서는 이유도 혹시 맞닥뜨릴지 모를 반가운 얼굴들에 대한 기대감 때문이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아내가 물건들을 사는 동안 그 사람들과 희로애락을 안주삼아 막걸리라도 한 잔 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셈평 때문이다.

이번 오일장에서도 몇 년 만에 한 후배를 만났다. 잘 살고 있는 줄만 알았던 그였는데, 빚 보증 때문에 지금은 남의 집 더부살이를 한다고 했다. 돼지 머리고기 한 쟁반에 막걸리를 나누어 마시며, 반가움의 한 편에서 구절양장처럼 꼬이는 그의 젊음에 내내 연민과 안쓰러움을 금할 수 없었다.

귀가를 재촉하는 아내를 따라 일어서는 내 등 뒤에 닿는 그의 목소리가 노을처럼 붉었다.

“형님! 다음 장에 나오세요. 제가 한 잔 살게요.”

<고권일·수필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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