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봉기와 제주학살은 국제적 사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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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상수, 한국사회과학연구회 이사장/논설위원

70년 전 제주섬은 학살의 광풍이 휘몰아치는 대비극의 현장이었다. 1950년 6·25전쟁과 더불어 고립무원의 섬에서 일어난 한국 현대사의 최대 비극이었다. 제주섬 안팎에서는 오랫동안 그 참극을 입에 올리는 것조차 금기시되었고 ‘4·3’, ‘사태’, ‘시국’ 등 숨죽여 불려 왔다.

그리고 이런 일들을 싸잡아 ‘폭동’과 ‘반란’, ‘폭도’로 낙인을 찍고 억압해 왔다.

천만 다행스럽게 기적이 일어난 듯이 1999년 12월 여야합의에 의해 대한민국 국회는 ‘제주4·3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을 의결했다.

1947년 3월 1일 3·1독립혁명선언 제28주년기념식이 제주북국민학교에서 성대하게 열렸다. 행사를 마치고 돌아가던 시위대를 구경하던 사람들이 관덕정 광장에서 처음으로 학살됐다. 미군정 산하 경찰이 쏜 총에 6명이 죽고, 6명이 다쳤다. 미군정 패트리지 대위도 현장 지휘에 나선 상황에서 일어난 일이었다.

그러나 미군정 산하 경찰은 진상조사도 제대로 하지 않고 ‘정당방위’라면서 피해자 탓을 했다. 2월 말 입도한 육지 경찰들이 발포했던 것이다.

이 관덕정학살은 제주 대학살이 일어나게 된 계기가 되고 말았다. 미국에서도 1770년 영국군 병사들이 미국인들을 쏘아 5명을 죽였다. 이 보스톤 학살은 미국 독립전쟁으로 나아간 도화선이었다.

관덕정학살에 분노한 도민들은 3월 10일부터 학살 항의 총파업에 나섰다. 그러나 당시 한국인중 미군정 최고위직이었던 조병옥 미군정 경무부장은 제주를 ‘공산주의자들의 섬’이라고 매도하면서 일방적으로 탄압하기 시작했다.

그 뒤 미군정은 12개월 동안 무려 2500여 명을 잡아 가두어 놓고 재판을 받게 했다. 끝내 고문을 당해 죽임을 당하는 치사사건이 일어나기도 했다. 제주 사람들은 일본으로 정치적 밀항을 하던지 미군정에 굴복하던지 아니면 한라산으로 피신해야만 하는 막다른 길로 몰릴 수밖에 없었다. 1948년 남한단독선거를 거부하며 ‘4·3봉기’가 일어났다.

그 해 4월 말 모슬포에 주둔하던 국방경비대 제9연대장과 인민유격대장 사이에 평화회담이 열려 더 이상의 충돌을 회피할 평화의 길이 열렸으나 미군정 산하 경찰의 방해로 좌절되고 말았다. 5월 미군정 수뇌부는 초강경 진압방침을 채택, 집행했고, 제주섬은 헌정 파괴와 인권 실종 사태에 빠져들었다.

70년 전 ‘4·3봉기’에 참여했던 350명 규모의 ‘산사람’들을 잡겠다고 3만여 명의 도민들이 희생됐다고 말해진다. 한국 정부의 진상규명위원회 공식 조사 보고서에 따르면, 1947년 3월 1일부터 1948년 8월 말까지 859명이 제주도에서 사망한 것으로 나타났다. 주한미군(USAFIK)이 한국을 직접 통치한 평화의 시기였다.

그리고 대한민국 정부 수립 뒤에도 희생자는 늘어나 1947년 3월부터 1949년 6월까지 1만761명이 사망했다고 보고됐다. 그때 역시 주한미군과 미군사고문단(KMAG)의 군대는 한국 군대와 경찰을 이끌고 모든 전투 작전을 지휘하고, 통제하고, 지원했다. 미국과 한국 두 나라의 군대와 경찰이 저지른 국가범죄, 반인륜범죄는 국제관습인권법에 의해 징치(징계해 다스림)돼야 하는 국제적 사건이다.

이제 ‘4·3봉기’는 분단반대운동, 통일운동, ‘원 코리아’ 운동, 인권운동, 생존권운동, 민족자결권운동으로 제 이름을 되찾아야 한다. 따라서 제주학살과 4·3봉기는 ‘제주4·3항쟁’이라는 이름으로 불려야 할 충분한 근거와 가치를 지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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