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덕구 산전(山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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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경업, 전략사업본부장 겸 논설위원
‘관덕정 광장에 읍민이 운집한 가운데 전시된 그의 주검은 카키색 허름한 일군복 차림의 초라한 모습이었다. 그런데 집행인의 실수였는지 장난이었는지 그 시신이 예수 수난의 상징인 십자가에 높이 올려져 있었다. 그 때문에 더욱 그랬던지 구경하는 어른들의 표정은 만감이 교차하는 듯 심란해 보였다.’

‘(중략) 그리고 집행인이 앞가슴 주머니에 일부러 꽂아놓은 숟가락 하나, 그 숟가락이 시신을 조롱하고 있었으나 그것을 보고 웃는 사람은 없었다. 그리하여 그날의 십자가와 함께 순교의 마지막 잔영만을 남긴 채 신화는 끝이 났다.’ 제주4·3의 핵심 인물인 이덕구(1920~1949)의 마지막 모습이라고 한다.

4·3문학의 1세대인 현기영 작가는 ‘지상에 숟가락 하나’라는 소설에서 무장대 사령관인 이덕구의 최후를 이같이 묘사했다. 4·3당시 그는 무장대의 상징적인 존재였다. 초대 사령관인 김달삼이 1948년 8월 북한으로 도피하자 그의 후임자가 돼 무장대를 이끌었다. 그는 1949년 6월 토벌대에 의해 사살됐다.

그의 시체는 관덕정 광장 십자형틀에 묶여 전시됐다. ‘이덕구의 말로를 보라’라는 글귀와 함께 말이다. 도민들은 침묵으로 이를 지켜봤다. 고향인 조천읍에서 역사와 체육을 가르치는 중학교 교사로 일하다 입산 약 2년 만에 이덕구는 그렇게 세상을 떠났다. 그가 지상에 남긴 건 달랑 숟가락 하나였다.

▲휴일인 지난 1일 고교 동창 산행 모임인 ‘아멩이나’ 회원들과 뜻깊은 탐방을 했다. 4·3 70주년을 맞아 제주4·3평화공원을 참배한 데 이어 이덕구 산전(山田)을 돌아본 것이다. 사려니숲길 입구에서 천미천을 지나 바로 오른편으로 이어진 오솔길을 따라 한참 가다 내창을 건너 올라가니 마침내 산전이 나왔다.

속칭 ‘시안모루’, ‘북받친밭’이라 불리는 깊은 산중이었다. 원래는 토벌대를 피해 산으로 은신했던 봉개리 주민 등의 삶의 터전이었다. 그러다가 주민들이 귀순한 1949년 봄 이후엔 이덕구부대가 잠시 주둔했다고 한다. 이곳 일대를 ‘이덕구 산전’이라고 칭하게 된 배경이다.

작은 상에 막걸리 한 잔과 담배 한 개비를 올려놓고 고개를 숙였다. 한데 덕구산전에 대한 평가가 엇갈리면서 친구들 간 갑론을박이 뜨거웠다. ’봉기·항쟁’ 또는 ‘폭동·반란’이라는 4·3의 성격 규정에 대한 현재의 시각 차가 그대로 반영된 게다. 하지만 결론은 4·3의 지향점인 ‘화해와 상생, 평화와 인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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