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용석, 무오년 법정사 항일투쟁 참가
고용진, 무과 급제·대정현감
고우태, 명월만호 부임…선전관 역임
고운석, 제주농업학교 1차 항일운동 전개
고운선, 야체이카 조직 합류
고운하, 학생 항일활동
고원일, 고산학원 이사장…재일 道개발협 창립
▲고용기高溶基:1885(고종25)~1944, 사업가. 고태양高太榮의 조부, 고석찬高碩贊의 선친. 국치國恥로 신학문에 밀려 구학문이 퇴색하여졌으므로 그는 문명을 떨치지 못했다.
고용기는 귀일貴日양조장을 경영했다. 영주음사瀛洲吟社 회원으로 다년 활약하며 많은 시詩를 남겼다.
※고용기의 시 ‘秋江(가을 강)’=霜葉蕭蕭捲地悲:떨어진 잎들 으스스 땅을 쓸어 날리는데/ 秋江澄碧暎人衣:맑고 푸른 가을 강에 사람 그림자/ 洲寒鷺向蒼暇宿:싸늘한 물가 백로는 갈대를 향하여 잠들고/ 水落魚呑白露肥:물려가는 조수에 고기는 맑은 이슬 먹어 살쪘다./ 中夜有聲風入樹:바람 붙은 나무에 밤 깊어 들리는 소리/ 衆峰如畵月臨幾:달 비친 낚시터엔 그림 같은 봉우리들/飜嫌名利還多事:명리를 구하다가 도리어 일거리 많아지는 것보다/ 漁釣釣生營計不非:고기 낚아 생계를 꾸려 보는 것도 잘못된 일 아니지. 【‘제주풍아’(오문복·2004)】
▲고용석高用錫:1866(고종3)~1928(일제강점기), 무오년 법정사의 항일운동. 원적은 안덕면 감산리<통-세미>이고, 중문리<중-물>에서 고명신高明信의 아들로 태어났다.
1914년 김연일은 중문면에 있는 법정사法井寺의 주지로 있으면서 항상 교도들에게 항일 사상을 고취하고 있었다. 검거된 총인원은 66명으로 대부분 불교도와 선교도들로서, 이후 3·1 운동 이전의 무력 투쟁 중 대규모라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고 평가됐다.
고용석은 1919년 2월 4일 광주지법 목포지청에서 징역 3년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르던 중 감형 1년이 내려졌다. 정부에서는 1995년 그에게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고용진高龍振:1859(철종10)~?, 무신. 대정현감. 한경면 두모리<두미>에서 고명서高明瑞의 아들로, 무과에 급제. 1881년(고종18) 11월 홍재진洪在晋의 후임으로 명월만호를 거쳐 1884년(고종21) 4월 김규임金圭任의 후임으로 도임하고 1885년 5월에 떠났다.
한편 1884년 9월 6일 무과 초시를 시행, 대정현감 고용진과 정의현감 방우량龐友亮이 시험관으로 입회, 1등은 제주목 거주 장행길의 아들 장재두張才斗가 영광을 얻었다. 또 동년 10월 15일 삼읍 마병도시馬兵都試를 시행, 제주 합격자 120명, 대정 53명, 정의 60명, 도합 합격자 233명이 모였다. 시험관인 대정현감 고용진과 정의현감 방우량이 입회하에 마병 고몽필이 수석으로 합격, 전시殿試에 직부하도록 하였다.
▲고우태高遇泰:1758(영조34)~1836(헌종2), 무신. 명월만호, 선전관宣傳官, 본관은 제주, 전 현감 고이지高以智의 8대손, 애월읍 곽지리<답단이-마을>에서 고성걸高成傑의 아들로 태어났다.
1794년(정조18)에 제주위유안무시재어사濟州慰諭按撫試才御史 심낙수沈樂洙가 내도, 같은 해 4월 문과에 7명, 무과에 10명을 시취試取할 때 그는 홍범익洪範翼, 김응복金應福과 함께 합격, 관직은 명월만호로 출발했다. 1798년(정조22)에 경상도 동래의 두모포豆毛浦 만호를 거쳐서 무신겸선전관武臣兼宣傳官을 역임했다.
▲고운석高雲石:1908(융희2)~1946(미군정기), 제주농업학교 학생의 제1차 항일활동.
본관은 제주, 고경환高景煥의 차남으로 산북 한경면 조수리<조숫-물>에서 태어나 1931년 3월 7일 제주농업학교를 졸업하였다.
그는 3월 9일 일본 경찰에 의해 체포되어 1931년 8월 29일 광주지법 목포지청에서 1년형을 선고받아 항소하니 1932년 대구복심법원에서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5년을 선고 받았다.
▲고운선高雲善:1907(광무11)~1954, 야체이카의 항일활동. 본관은 제주, 고태흠高台欽의 아들, 한림리<한-수풀>에서 태어났다.
고운선은 1929년 3월 제주공립농업학교 3학년을 졸업했다. 그는 한림에서 잡화상을 하면서 1931년 12월 이익우李益雨에 의해 김태안과 함께 야체이카 조직에 합류해 한림면 야체이카의 청년부·재무부를 담당했다.
1933년 3월 청년 운동가들이 검속 선풍에 의해 100여 명이 체포되어 일경의 혹독한 고문 끝에 혁우동맹·야체이카의 관련자 40명을 재판에 회부, 그도 징역 2년 집행유예 4년이 선고받았다.
▲고운하高雲河:1922(일제강점기)~?, 일본 나가사키<長崎>에서 학생의 항일활동.
본관은 제주, 고평호高平浩의 6남, 우도牛島에서 태어나 1939년 성산읍 성산리로 옮겨 살았다.
고운하는 일본으로 건너가 나가사키현 현립 간조<諫早> 농학교에 유학 가서 공부하면서 학우 김상훈金相勳(월정)과 함께 1940년 4월 중순경 상급생 교포 학생들로부터 신입생 환영 축하회에 초청받아 참가했다. 이때 상급생들에게서 “한국의 독립을 최고의 목표로 삼아라”는 얘기를 들어 공감, 재학 중 일본 학생들로부터 수모를 받아 더욱 항일 감정이 노출되었다.
1941년 6월경 유언비어를 유포시켰다고 구속, 고운하는 1943년 5월 7일 대구지방법원에서 징역 1년 6월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고원일高元一:1918(일제강점기)~1982, 고산학원 이사장, 재일본 제주도개발협회를 창립해 초대 회장을 지냈다. 호는 동파東坡. 한경면 고산리<차귀>에서 아버지 고익준高翼駿과 어머니 좌우묵左右黙 사이에서 차남으로 태어났다.
고원일은 1926년 3월 향리의 보창의숙普昌義塾 4년 과정을 졸업했다. 고원일은 1945년 일본에서 다카하시<高橋>전기상회를 차려 1950년부터 날로 사업이 번창해 동경東京 우에노<上野>에 ‘중앙전기상회’로 상호를 변경, 사업을 확장했다.
그는 1961년 재일본在日本 제주출신 실업가들을 규합, 재일본 제주도개발협회를 창립해 초대 회장으로 취임했다. 그는 특히 학교의 20개 교실을 신·증축하는 데 많은 기금을 희사했고 아울러 교포들에게 학교 지원을 호소했다.
1965년 재일在日 고산중학교 증축위원회 위원장, 1965년 9월 학교법인 고산학원 이사장에 취임하였다. 16년 동안 재임하면서 고산상업고등학교의 개설과 운영 및 고향을 위해 헌신한 생애였다. 그의 유해는 부인 구성순具成順여사와 함께 한경면 조수리 ‘굽은-오름’에 안장, 고산중고교 학생과 졸업생이 참배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