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뛰어난 능력 있는 사람 넷을 일러 ‘탐라사절’이라 불렀다
(83)뛰어난 능력 있는 사람 넷을 일러 ‘탐라사절’이라 불렀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페이스북
  • 제주의뉴스
  • 제주여행
  • 네이버포스트
  • 카카오채널

문영후, 오수찰방 등 역임…세금 감면 등 제주 백성 편의 증진 앞장
한라산 뒤로하고 명월포 바라보는 형국…무덤에 비석·동자석 등 놓여
제주시 한림읍 동명리 문수동 마을 남쪽 밭머리에 있는 문영후 무덤의 모습. 이 무덤은 한라산을 뒤로하고 명월포를 바라보는 형국이다.
제주시 한림읍 동명리 문수동 마을 남쪽 밭머리에 있는 문영후 무덤의 모습. 이 무덤은 한라산을 뒤로하고 명월포를 바라보는 형국이다.

‘10년이면 강산도 변한다는 말은 벌써 옛말이 되었고, 1년이면 자신이 잘 알던 동네의 길마저도 헛갈려서 길 찾기가 어려운 시절이 돼버렸다.

지금 제주의 마을에는 제주지리대교란이라는 어느새 도시인지 시골인지 모르는 정체불명의 제3의 공간을 만드는 일이 벌어지고 있다.

제주도 전통마을이 무자비하게 파괴되고 있고, 또 부동산 바람이 불면서 농토와 토지가 팔려 수 만년 형성된 자연환경과 장구한 시간이 만들어낸 농촌경관이 검은색 철판과 콘크리트 시설물로 채워지고 있다.

실로 자본의 힘은 막대하다. 이미 경관이 좋은 장소의 산담들은 개발을 기다리면서 해체됐고, 땅값이 오르면서 조상의 무덤을 이장하는 것이 유행처럼 되었다.

우리는 토지의 사적 소유가 미치는 결과를 많이 보아왔다. 과거 관광개발이라는 이름으로 대규모 토지 잠식이 있었고, 곳곳의 매립지 결과는 삶의 터전만 망쳤을 뿐 주민들을 소외시켰다. 곳곳에서 제주가 사라지고 있다는 말이 들린다.

제주가 무엇인가. 제주 냄새다. 제주 냄새는 무엇인가. 제주의 색깔이다. 제주의 색깔은 무엇인가. 제주의 삶의 소리다. 제주의 삶의 소리는 무엇인가. 제주, 제주인의 생로병사를 아우르는 문화다.

문화는 그 땅에서 누린 행복, 그 땅을 겪어온 아픔, 희로애락의 모든 실존적 결과이다. 제주다움은 이 땅에서 살았던, 이 땅에서 살아가는, 모든 이들의 지문(指紋)과 같아서 개인과 공동체의 총합의 기운이다.

 

지절 좌우 아래에 서 있는 문영후 무덤 동자석.
지절 좌우 아래에 서 있는 문영후 무덤 동자석.

탐라사절 문영후

제주에서는 뛰어난 능력이 있는 사람 넷을 일러 탐라사절(耽羅四絶)’이라 불렀는데, 미래 예측 잘하는 문영후, 풍수지리에 밝은 고홍진高弘進, 의술로 유명한 진국태秦國泰, 풍채가 아름다운 양유성梁有成이 이들이다.

김석익金錫翼은 문영후에 대해 이렇게 썼다. “왕자 ()창우昌祐의 후손으로 문예(文藝)가 남보다 뛰어났고, 점치는 일에 더욱 교묘하여 기이하게 많이 맞혔다. 과거의 예규에 따라 육품(六品) 벼슬을 받았고, 숙종(肅宗) 때 제주 교수(敎授)를 보직 받았다. 옛날 사목(事目)에 교수가 판관(判官)의 윗자리에 앉기 때문에 교수와 판관의 자리다툼이 많았다. 영후榮後는 제주 사람으로 스스로 도판道判(判官)에게 관민(官民)의 분수를 말하고, 목사 앞에 앉을 때에는 스스로 도판의 아래에, 兩縣監(대정·정의현감)의 위에서 처신해 당시 사람들이 그를 칭찬했다. 목사 임홍망任弘望(재직기간 : 1680~1681)이 일찍이 부역(賦役)이 고르지 못해 개정할 것을 청했는데, 영후가 그 일을 실제로 주관해 너그럽고 고르게 하도록 힘써 명목 없는 세()를 없애자 백성들이 매우 편리하게 생각했다. 벼슬은 곡성 현감을 지내다 죽었다.”

문영후文榮後<1629(인조 7)~1684(숙종 10>는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자는 인경(仁卿), 본관은 남평(南平)이다.

오늘날 행정구역으로 제주도 애월읍(涯月邑) 어음리(於音里)에서 태어났다. 1664(현종 5) 8월에 조정에서 정언(正言) 윤심(尹深)을 제주시재어사(濟州試才御使)로 보내어 관리 등용을 위한 과거를 보게 했는데 이때 사촌동생인 문징후(文徵後·1632~?), 고홍진(高弘進·1602~1682)과 함께 문과에 급제했다.

문과 합격자에게는 초시와 복시를 치르지 않고 바로 전시(殿試)에 응시할 수 있는, 이른바 직부전시(直赴殿試)의 특전이 주어졌는데, 2년 후인 1666(현종 7) 식년시(式年試) 병과(丙科) 8위로 급제했다.

이때 문영후와 나머지 2인이 왕 앞에서 문답 시험을 치르는 직부전시를 부여받자 사간원에서는 함경도와는 달리 작은 섬에서 뽑힌 급제자라고 하여 이들의 직부전시를 취소해달라고 건의했으나 왕이 이를 듣지 않았다.

또 곡성현감 시절 문영후는 전라감사(全羅監司)의 장계에 의해 고을의 유부녀와 스캔들을 일으킨 죄로 곤욕을 치르기도 했다.

문영후는 급제 후 전라북도 남원의 오수찰방(獒樹察訪)과 곡성현감(谷城縣監)을 역임했다.

1681(숙종 7) 제주도좌수(濟州島座首) 오상현(吳尙賢)과 함께 공정하지 못한 도민의 부역에 대해 제주목사(濟州牧使) 임홍망(任弘望)에게 진언해, 조정을 통해 법령을 바로잡게 하였다. 또한 과중하게 부과된 세금을 줄여 제주 백성들의 삶이 편안해지도록 힘썼다.

1684(숙종 10) 제주향교의 교수로 임명되었다. 시문과 글씨에 능하고 천문에도 조예가 깊었으며 복서(卜筮)를 잘해 장래를 잘 알아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고 한다.

 

문영후 무덤 산담 위 목이 부러진 문인석.
문영후 무덤 산담 위 목이 부러진 문인석.

문영후의 무덤

명월포는 이제 고려시대 대표적인 포구로 최영 장군이 상륙한 곳이기도 하고 현재 진성이 복원되었지만 필자가 봤던 1980년대의 원래 진성과는 완전히 달라 엊그제 신축한 성이 돼버렸다.

명월진성 가까이 있는 마을은 한림읍 동명리 문수동이다.

과거 고즈넉했던 마을 분위기도 사라져 이제는 오래된 마을임을 폭낭을 보아야만 알 수 있어, 여느 제주마을처럼 외부 바람을 타고 한창 도시화로 탈바꿈하는 중이다.

문영후의 무덤은 마을 남쪽 밭머리에 있는데 주변 토지가 벌써 잠식되고 있어 이 주변도 큰 변화가 예상되고 있다. 제주마을 어디를 가나 똑같이 획일적인 도시 변두리가 탄생하고 있는 것이다.

문영후의 무덤은 한라산을 뒤로하고 명월포를 바라보는 형국이다. 봉분 앞에는 현무암 상석이 있고 그 왼편으로 누런빛이 감도는 조면암으로 된 월두형 비석이 측면으로 세워져 있다. 비석의 글자는 심하게 마모돼 있어 通訓大夫行谷城縣監兼南原鎭管兵馬節制都尉文公之墓라고 겨우 읽을 수 있다. 비석 뒷면의 작은 글자들은 띄엄띄엄 읽을 수 있을 뿐 약 80%가 마모돼 있다.

지절(階節) 아래 좌우에는 현무암 동자석이 외롭게 서 있다. 잘 만들지는 못했지만 그래도 제주도 석상의 맛을 그대로 보존하고 있다.

아름다움이 잘 생긴 것만으로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동자석들은 시간의 흔적까지 머금고 있으므로 현대의 어떤 조형물보다도 따뜻한 소박미의 감성을 더해준다. 산담의 배치 모습을 보면 적어도 망자를 생각하는 품위가 오늘날 보다 더 인간적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산담은 넝쿨로 덮여 있고 우측 산담 위에 안타깝게도 목이 부러진 문인석 한 기가 누워있다. 손에는 긴 술병을 들고 있다. 이 석상은 지금 처지를 반영하는 것처럼 이곳 무덤도 시류에 말려 이사를 가게 될 것이고 지금의 산담도 해체될 것을 짐작하고 있는 듯하다.

이 변화 속도라면 현 존재인 우리가 해결할 수 없는 시간의 성과를 하루아침에 멸실해버리는 과오를 저지를 것이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