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무장대 80명 토벌에 경찰병력 500명 투입
(12)무장대 80명 토벌에 경찰병력 500명 투입
  • 좌동철 기자
  • 승인 2018.0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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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라산 숨은 무장대 토벌 위해 주둔소 설치...최후의 무장대 1957년 체포
수악주둔소가 한라산 자락 깊은 숲 속에 들어서면 원형이 보존돼 있는 모습. 성곽은 외성과 내성으로 2중으로 설치됐다.
수악주둔소가 한라산 자락 깊은 숲 속에 들어서면 원형이 보존돼 있는 모습. 성곽은 외성과 내성으로 2중으로 설치됐다.

서귀포시 남원읍 신례리에 있는 수악주둔소는 4·3사건의 전개 과정을 이해할 수 있는 유적이다. 토벌작전의 거점 역할을 했던 경찰 주둔소는 한라산을 빙 둘러가며 32곳이 있었다.

깊은 숲 속에 있는 수악주둔소는 원형이 잘 보존되면서 4·3유적으로는 처음으로 국가 등록문화재(제716호)에 올랐다.

전체 면적은 1920㎡이며, 석성길이는 271m에 이른다. 주둔소 중에서 규모가 가장 크고 건축적인 면에서도 형식과 구조가 독특하다는 평가다.

수악주둔소 외에 조천읍 선흘2리와 중문동 녹하지(알오름), 안덕면 돌오름, 5·16도로 변 수악교 인근에도 주둔소의 원형이 남아 있다.

 

수악주둔소 성벽에 난 총구.
수악주둔소 성벽에 난 총구.

▲주민들 부역에 동원=수악주둔소는 마을 주민들을 동원해 석축을 쌓았다.

토벌대 30명 이상이 잘 수 있는 큰 마루방이 있었다. 주요 주둔소는 60명이 거주할 정도로 규모가 컸다. 경찰은 쌀만 비축해 놓으면서 정해진 날짜에 맞춰 부식(반찬)과 물을 제공해야 했다. 이는 각 마을마다 할당됐다.

주둔소는 한라산 해발 1500m까지 설치되면서 주민들은 가파른 산길을 따라 부식을 나르면서 고초를 겪었다. 여기에 경찰 1명 당 마을 청년 5~6명이 상주해 경계를 섰다. 청년들은 경찰과 함께 토벌에 나서기도 했다.

 

1948년 9월 한라산 정상 부근에서 작전 중인 9연대 장병들. 4·3진상조사보고서 수록
1948년 9월 한라산 정상 부근에서 작전 중인 9연대 장병들. 4·3진상조사보고서 수록

▲주둔소가 설치된 이유=4·3초기 진압군은 1946년 모슬포에서 창설된 9연대였다. 향토부대인 9연대는 제주 청년에 이어 경상·전라도 청년들도 모집돼 800명에 이르렀다.

1948년 5월 9연대 탈영병 중 20여 명이 소총과 실탄 2000여 발을 갖고 무장대에 합류하는 등 잦은 탈영과 무장대 편에 가담하면서 미군정은 9연대를 신뢰하지 않았다.

1948년 12월 9연대는 대전에 주둔한 2연대와 전격 교체됐다. 2연대는 여순사건을 진압한 실전을 쌓은 부대로 초토화 작전을 수행했다. 1948년 말부터 이듬해 2월까지 많은 희생자가 발생했고, 중산간 마을 95%는 불에 타 사라지는 등 그야말로 ‘초토화’가 됐다.

기관총은 물론 박격포를 갖춘 2연대의 강력한 진압에 무장대는 세력이 약화됐다.

1949년 6월 무장대 총책 이덕구가 사살되면서 무장대는 궤멸됐지만 80여 명은 한라산으로 숨어들어 끝까지 저항했다.

1950년 6·25전쟁이 발발하자 제주에서 있던 군부대는 전방으로 진출했고, 남은 무장대(경찰은 ‘잔비’라 불렀음)를 토벌하기 위해 경찰병력이 대거 투입됐다.

산 속에 들어간 무장대를 소탕하기 위해 한라산을 포위하는 형태로 32곳의 주둔소가 설치됐다.

잔여 무장대의 섬멸을 위해 1952년 11월 100전투경찰사령부가 창설됐다. 사령부는 4개 부대와 본부·통신·보급 등을 합쳐 총 병력은 500여 명에 이르렀다.

 

1954년 9월 21일 금족령이 해제되면서 한라산 백록담 북쪽 능선에 세워진 한라산개방평화기념비.
1954년 9월 21일 금족령이 해제되면서 한라산 백록담 북쪽 능선에 세워진 한라산개방평화기념비.

▲최후의 무장대 체포=경찰은 진압과 함께 귀순작전을 함께 펼쳤다. 1954년 2월 무장대는 5명이 있었지만 행적을 찾지 못했다. 신상묵 도경찰국장은 1954년 9월 21일 금족령을 해제하고 한라산을 전면 개방했다.

마지막 무장대 5명 중 정권수·김성규 등이 사살된 데 이어 1957년 3월 유일한 여성 무장대원인 한순애가 제주시 월평동 견월악에서 붙잡혔다. 한순애의 가방 안에서 발견된 것은 무기가 아니라 그릇과 모포, 식량이었다. 1957년 4월 최후의 무장대였던 오원권이 구좌읍 송당리에서 붙잡히면서 4·3사건 발생 6년 6개월 만에 한라산에서 총성이 멈췄다.

 

김은희 4·3연구소 연구실장
김은희 4·3연구소 연구실장

(인터뷰) 김은희 4·3연구소 연구실장

김은희 4·3연구소 연구실장은 한라산에서 매복을 하고 주둔소에서 잠복근무를 했던 경찰이 되레 무장대와 같은 삶을 살았다고 밝혔다.

김 실장은 “주둔소에서 3개월간 교대 근무를 마치고 나온 경찰관은 수염이 덥수룩하고 몰골이 꾀죄죄해 그들은 무장대와 다름없는 모습이었다”고 말했다.

경찰은 주둔소마다 연결한 통신선을 무장대가 절단하면서 골머리를 앓았다. 전투 경험이 부족했던 경찰은 서로 간 오인사격도 빈발했다.

해발 500m 이상 고지대의 작전지역은 100전투경찰사령부가 담당했고, 그 밑에는 각 경찰서의 유격대가 담당했다.

“100사령부 대원이 500고지 밑으로 내려왔다가 경찰서 소속 유격대의 잠복에 걸려 경찰끼리 교전해 피해를 보는 일이 많았죠. 작전 중에 자기들끼리 총질을 하다 전사한 경우도 있었습니다.”

무장대에게는 현상금이 내걸렸고, 사살하면 1계급 특진이 주어졌다. 하지만 특출한 전과를 올리지는 못했다.

김 실장은 “주둔소에 근무했던 경찰관들을 인터뷰한 결과 ‘성과는 없었고 고생만 했다’는 당시를 상황을 들을 수 있었다”고 말했다.

경찰 병력을 대대적으로 모집했지만 주둔소가 철수하면서 1958년에는 경찰관이 대량 해고되는 구조조정이 단행됐다.

1952년에는 육군 특수부대인 무지개부대가 투입되기도 했다. 6·25전쟁 중에 이들은 북한에 침투할 목적으로 하와이에서 특수훈련을 받았고, 최종 훈련지로 한라산에 배치됐다.

모포와 우비만 지급받은 이들은 2인용 참호를 파고, 산에서 매복을 하면서 무장대보다 더 어렵게 생활한 것으로 알려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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