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추와 처서 사이
입추와 처서 사이
  • 제주신보
  • 승인 2018.08.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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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머리 위로 8월의 태양이 잉걸불로 이글거려도 분명 입추는 엊그제 지났다. 입추는 가을의 들머리라 듣기만 해도 선선하다. ‘秋’자가 들어 있잖은가.

입추는 24절기의 열세 번째다. 양력 8월 8일 경, 대서와 처서 사이다. 지겨운 가마솥더위가 제풀에 꺾이면서 가을로 접어든다는 절기다. 이날부터 입동까지가 ‘가을’이다. 그 초후(初候)엔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고, 차후(次候)엔 흰 이슬이 내리며, 말후(末候)엔 쓰르라미가 운다고 했다. 말만 들어도 살맛난다. 입하부터 입추까지 백성들이 조정에 얼음을 진상하면, 이를 대궐에서 쓰면서 조정 대신에게도 나눴다는 기록이 있다.

벼가 한창 익어 갈 때라 하늘이 쨍하게 맑아야 한다. 조선시대에는 입추가 지나 비가 닷새로 이어지면 조정과 고을에선 비를 멎게 해 달라는 기청제(祈晴祭)를 올렸다. 곡식이 한창 여물어 갈 때라 날씨를 보고 점을 쳤다. 청명하면 만곡이 풍년이고, 이날 비가 조금 내리면 길한데 많이 내리면 벼가 상한다고 했다. 천둥이 치면 수확량이 적다고 했으며.

입추가 지났는데도 늦더위가 득달같이 기승을 부리지만 밤엔 바람이 솔솔 불어와 더위에 시달린 고단한 몸을 어루만져 준다.

하지만 진정한 가을의 시작은 처서다. 처서 뒤에는 싸한 가을 기운이 감돈다. ‘처서가 지나면 모기도 입이 비뚤어진다’고 해 실감을 더한다. 서늘해질 무렵이라 한철 왕성하던 모기란 놈도 기를 못 쓴다 함이다.

지금은 어서 서늘해졌으면 하고 종종대지만 예전엔 그렇지 않았다. 옛날엔 생업이 농사라 선선한 날씨라고 마냥 좋은 게 아니었다. ‘처서에 비가 오면 독의 곡식도 줄어든다.’는 속담이 있다. 처서는 벼 이삭이 패는 때다. 강렬한 햇살을 받아야 벼가 성숙하는 법, 날씨가 농사의 풍흉을 좌우했다. 처서에 뿌리는 비를 ‘처서비’라 해서 농사에 유익한 게 못 됐던 것이다.

처서는 그 차례가 입추 다음이라, 입추와 백로 사이에 낀 절기다. ‘處暑’, 말 그대로 더위가 그친다는 의미다. ‘땅에선 귀뚜라미 등에 업혀 오고, 하늘에선 뭉게구름 타고 온다’고 한 게 바로 처서 아닌가.

신비한 게 자연이다. 염량(炎凉)이 때를 알아 어김이 없다. 덥다고 투덜대지만 입추가 가을을 부르는 것은 영묘한 이치다. 입추가 지나도 잔서(殘暑)가 물러가지 않아 힘들게 하지만, 밤이면 청량한 기운으로 살판난다. 이때부터 가을 채비를 서둘러야 한다. 연년이 지나치지 못하는 김장을 위해 무와 배추를 심어야 하는 것이다. 김매기도 끝나 가고 농촌도 한가해질 시기다. 그래서 나온 말이 있다. “어정7월, 건들8월”. 어정어정 건들건들 보내는 한때라 함인가. 5월이 모내기와 보리 수확으로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때임을 “발등에 오줌 싼다”라 한 것하고는 매우 좋은 대조다.

하긴 입추라 해 봤자 체감되는 날씨는 한여름 더위가 이어진다. 더욱이 온난화로 지구가 점점 달아오르지 않는가 말이다. 연구에 따르면, 지난 30년 간 평균기온이 가장 높은 절기가 여름더위의 절정인 ‘대서’가 아닌 ‘입추’라니 흥미롭다.

입추와 처서가 지나도 가을이 오지 않는 요즘의 24절기는 절후에 맞지 않으니, 별다른 의미가 없어 보일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절후도 예로부터 전해 내려오는 우리의 소중한 정신문화유산의 하나다. 그 의미를 오늘에 새긴다고 나쁠 게 없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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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준 2018-08-14 13:35:06
곧 죽어도 처서만 기다리며 사는 올해 여름 그래도 처서인데 달라도 뭐가 다르겠죠

2018-08-12 02:42:23
더워서 인터넷에 ‘처서’ 검색하다가 읽게 됐어요. 마음이 따뜻해지는 글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