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나는 붓을 그냥 던져도 그림이 된다”…한국의 피카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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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진호, 日 공산당 입당…항일 활동
고진희, 제주 부녀동맹 여성운동가
고창률, 파격 회화 선보인 천재 승려
고창무, 민전 결성…사무국장 맡아
고창빈, 명월만호·첨지중추부사
걸레스님 중광의 생전 모습. 그는 시, 서, 화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연합뉴스
걸레스님 중광의 생전 모습. 그는 시, 서, 화에 뚜렷한 족적을 남겼다. 연합뉴스

고진호高珍浩1916(일제강점기)~?, 일본 오사카<大阪>에서 공산당의 항일 활동.

본관은 제주, 고계생高癸生의 장남으로 산북 구좌읍 하도리<별방>에서 태어났다.

19325월경 일본공산당에 입당해 오사카시 위원회에 가입, 당 세포 및 대중 단체 프락치로 적기赤旗및 기타 문서의 살포에 종사했다.

또 당 중앙부 간사이지방위원회 반제反帝프락치로, 활동하던 중 19341227일 오사카부에서 체포돼 1935130일 송치됐다. 1936812일 오사카 지방재판소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을 선고받아 옥고를 치렀다.

고진희高眞姬()1911(일제강점기)~?(분단시대), 여성운동가. 북한 최고인민회의 대의원.

항일독립운동가 강규찬姜圭贊의 부인. 제주시 삼도리<제주-성안> 진성동陳城洞 태생, 1946년 조선공산당 제주도당 부녀회장을 지내고 남로당으로 개편되면서도 승계됐다.

또 제주도 부녀동맹 간부로서 제주도 3·1절 시위사건으로 체포돼 19475월 관련자 328명이 모두 재판에 회부됐다.

이 중 실형선고는 52명에 불과하였고 52명이 집행 유예, 56명이 벌금형으로 풀려 나왔으며 나머지 168명이 기소유예, 불기소 등으로 처리되었다.

이때 고진희는 미군정 포고령 제2호 및 군정법령 제194조 위반으로 56일 미 군정재판에 의해 체형 5개월에 벌금 2000, 집행 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19484·3 사건 직후 이정숙과 함께 남편을 따라 월북越北, 해주대회에 참가하고 북한 최고인민회의 제1기 대의원(국회의원에 해당)에 부부가 함께 뽑혔다.

남편은 6·25 전쟁 때 사망한 것으로 전해지고 두 아들 강희진과 강석진은 북한에서 살며 강석진은 선박공업부 선박무역공사公社의 과장으로 있다.

그녀는 남하해 빨치산 활동을 하던 중 19512월 군경에 체포됐다.

 

걸레스님 중광의 작품. 그는 선화(禪畵)의 영역에서 파격적인 필치로 독보적인 세계를 구축했다.
걸레스님 중광의 작품. 그는 선화(禪畵)의 영역에서 파격적인 필치로 독보적인 세계를 구축했다.

고창률高昌律1936(일제강점기)~2002, 승려, 시인, 행위예술가. 한국평론가협회 최우수 예술인상을 수상한 바 있다.

승명은 중광重光 혹은 걸레스님, 법호는 농암聾庵, 백담사의 오현五鉉 스님이 지어준 것인데 허튼 소리 하지 마라는 뜻이었다.

그는 제주시 외도동<-도그내> 외도교外都橋 근처에서 태어났다. 외도초등학교를 나온 것이 학력의 전부이다.

1960년 경상남도 양산의 통도사通度寺의 고승 구하九河 스님의 제자로 들어가 불제자의 수업을 받았다.

전 조계종 종정 월하月河 스님과는 호형호제呼兄呼弟의 사이였다.

중광이 걸레스님으로 불러지게 된 동기는 1977년 영국 로열아시아 소사이어티에 초대돼 걸레 시를 발표하면서부터이다.

장욱진 화백이 중광스님을 향해 중놈치고는 옷 한번 제대로 입었네라고 말한 것은 유명한 일화다.

형제가 모두 재주가 뛰어나 친형은 육사陸士를 졸업, 6·25 때에 전사했다.

, , 에 뚜렷한 족적을 남긴 중광 스님의 예술세계에 대해 미술평론가 이일은 동양화나 서양화 또는 구상이나 추상화라는 이분법적 한계를 뛰어넘어 천회무봉의 경지를 보이는 파격의 회화라고 평했다.

그는 1977년 조계종 중앙종회 의원을 역임하기도 했지만 스스로 시정의 속기俗氣와 떼를 닦는 걸레이기를 자처했던 예인藝人이기도 하였다.

그의 예술세계는 외국에서 먼저 인정받았다. 영국 왕립아시아학회(77버클리대학(80록펠러재단(83) 등에서 선화禪畵와 선시禪詩를 발표하면서 주목받은 것이다.

1979년 중광을 한국의 피카소라고 평한 미국 버클리대학 랭커스터 교수는 중광을 주인공으로 한 광승狂僧이라는 책을 펴냈고 일본에서는 큰스님이라는 제목으로 작품집을 냈다. 미국 CNN, 일본 NHK 등은 그의 예술세계를 다룬 프로그램을 내보내기도 했다.

1988년 일본 도쿄<東京>에 중광인터내셔널을 설립했다. 그의 작품은 뉴욕의 록펠러재단, 미국 샌프란시스코 동양박물관, 영국의 대영박물관 등에 소장되어 있다.

스님은 삶의 방식 자체가 거침없고, 자유분방했다. “나는 붓을 그냥 던져도 그림이 된다는 식의 자랑도 스스럼없이 늘어놓았고 시문에서 불교는 물론 유교, 기독교가 수시로 등장했다.

서예에도 남다른 재주를 보였다. 왼손, 오른손을 같이 사용하면서 정통필법을 무시하기 일쑤였는데, 글씨를 쓰더라도 마지막 획부터 시작해 반대로 써 옆에 앉아 있는 구경꾼들이 종잡지 못하게 했다.

이런 글씨는 특출한 서예가들이 평생을 정진한 뒤에 도달할 수 있는 경지로, 서체를 글씨를 갓 배운 어린이의 동자체童子體를 닮아 고졸하다는 평가를 들었다.

건강이 쇠하자 1998년 강원도 백담사로 들어가 수행하며 달마 그림에 몰두했다.

고창무高菖武민전民戰 사무국장, 제주시 삼양동<-> 태생, 1947년 제주도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民戰> 발기인.

1947712일 민족주의민족전선 민전 의장에 박경훈朴景勳(전 도지사)을 추대, 부의장에 김시범金時範, 사무국장에 고창무를, 사무차장에 김창순金昌淳, 선전부장에 김행복金行伯, 조직부장에 문경원文景源을 선임했다.

그러므로 조선공산당 제주도濟州島위원회를 중심으로 민주청년동맹, 부녀동맹, 교육자동맹, 노동자동맹 등이 총망라한 통일전선이었다.

194756일 제주3·1시위사건 공판에서 벌금 3000원을 언도받았다.

1948년 제주4·3사건 당시 좌익 중견으로 체포돼 미군정 재판으로 형기刑期를 마쳐 석방했다.

앞서 동년 217일 오후 5시에 3·1기념행사 준비회가 끝난 뒤에 안세훈을 비롯한 고창무, 김정로<이호>, 김용해<하귀> 30여 명의 발기로 민주주의민족전선을 결성하기로 했다.

이는 반탁反託의 우익(이승만, 김구, 김규식) ‘비상정치회의에 대응하기 위한 좌익左翼진영의 결속체結束體였다.

고창빈高昌彬1778(정조2)~?, 무신. 명월만호 및 대정현감,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제주-성안에서 태어났다.

대정현감을 지낸 고한조高漢祚의 아들, 이 부자는 당대의 부호이다. 무과에 합격하고 명월만호·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를 역임했다.

1820(순조20) 4, 김인택金仁澤의 후임으로 대정현에 도임했다. 그의 조부 고취선高就善도 흉년에 진휼賑恤해 가선대부에 가자加資되었고 부친 한조漢祚도 여러 차례 원납미願納米를 연출捐出해 기민饑民을 구제하여 선정했는 데 그도 역시 선정관으로 알려져 나중에는 오위장에 서하였다.

현감 고창빈은 세금을 공정히 하고 백성을 잘 다스려 그에 대한 선정비가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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