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정역사문화연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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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동수 논설위원

동계 정온(鄭蘊)은 1614년(광해군 6년) 강화부사 정항이 9세의 영창대군을 살해하자 상소를 올렸다. “어린이는 실상 반역을 모의한 사실이 없었는데, 정항이 위협하여 죽게 하였으니 이는 전하께서 한악(悍惡)한 무부(武夫)의 손을 빌려 죽인 것입니다. 정항을 죽이지 않는다면 전하께서 선왕의 묘정(廟廷)에 설 면목이 없을 것입니다.” 이로 인해 그는 같은 해 대정현(大靜縣)에 위리안치되었다.

형 임해군을 죽이고, 인목왕후를 유폐한 후 왕후의 아버지까지 죽인 절대권력자의 성정으로 볼 때 목숨을 보전한 것만도 다행이었다.

정온은 해배(解配) 후 이조참판에 올랐다. 인조 14년 병자호란 때 남한산성에 있던 임금이 청나라에 항복한다고 하자 “나라가 망한다고 하여 오랑캐에게 항복하는 것은 내 수치로 여긴다”고 하며 칼을 뽑아 스스로 찔렀지만, 목숨은 끊어지지 않았다. 현재 대정읍 보성초등학교 정문에 ‘동계 정온 선생 유허비’가 있다.

▲추사 김정희는 대정현에 근 9년이나 있었다. 그래서 대정하면 유배객을 떠올리지만, 저항의식도 강한 곳이다. 강제검, 이재수 등이 이곳 출신이다. 1862년(철종 13)에 들어서자 경상·전라·충청 등을 중심으로 전국 70여 개 고을에서 농민항쟁이 일어났다. 원인은 삼정(전정·군정·환정)의 문란과 농민들에 대한 억압과 수탈이었다. 이를 두고 임술민란(壬戌民亂)이라 한다.

제주에서는 강제검(?~1863·철종14)이 이를 주동했다. 그는 그해 11월 15일 수만의 농민으로 구성된 봉기군을 이끌고 제주성안으로 들어가 부패관리 처형을 요구하며 관아를 점거했다. 제주목사 임헌대는 겁에 질려 한때 화북포로 피신하기도 했다. 그 사이 봉기군은 부패관리를 처단하고 그들의 집과 재물을 불태웠다. 이 항쟁은 다음 해 4월에 완전히 수습되었다. 조정은 제주목사를 귀양 보냈으며, 강제검 등 주동자급 22명을 효수했다. 이 사건을 제주의 임술민란 혹은 강제검난이라고 부른다.

▲대정역사문화연구회가 대정의 인물과 문화 유적을 담은 ‘사라져가는 대정읍 역사·문화의 현장 교육 및 전승­-옛날엔 영 살아 수다 1’을 최근 펴냈다.

지난해 이맘때 연구회 소속 어르신들과 함께 송악도서관이 주최한 프로그램에 참여해 알뜨르, 섯알오름 학살터, 백조일손묘역 등을 탐방할 기회가 있었다. 해박한 지식과 경험을 바탕으로 한 그들의 ‘노변 특강’ 이 인상적이었다. 책자를 펼쳐보니 그 내공이 새삼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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