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움, 그리고 비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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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운진 동화작가

생애 모든 삶을 경험하고 돌아온 나이 환갑. 옛 시절 같았으면 관직에서 물러나 조용히 인생을 관조하고 집안 큰 어른으로 남는 나이가 환갑이다. 그런데 이게 어인 일인가? 환갑이 인생을 새롭게 시작하는 시대가 되어버렸으니 말이다. 격세지감이다. 평균 수명이 늘어나서일까? 사람들이 도무지 일손을 내려놓지 않는다. 은퇴자들이 우리 사회 각계에서 다시 화려하게 데뷔하는 얘기들이 수없이 회자(膾炙)되곤 하는 세상이 되었다. 정년퇴직 후에도 자꾸 선거판에서 출마를 언론에 흘리며 몸값을 올려보려는 자들도 넘쳐난다.

은퇴 후에도 잊혀 지길 거부하는 그들이 꿈꾸는 세상은 과연 어떤 세상일까? 천계서(天啓書)로 신성시되는 우파니샤드는 버림으로써 얻고 평안을 찾는다는 평범한 진리를 가르치지만 그걸 깨닫지 못하니 안타깝기 그지없다. 은퇴자들이 집착을 버리고 낮은 곳에서 구도자의 삶을 살아갈 순 없는 것일까?

폭염이 한창인 말복 무렵 난 야간대학교 동창회에 참석했었다.

회원님들 오늘은 퇴직 이후 근황에 대해 각자 얘기하는 시간을 갖겠습니다.”

은퇴 후 사업가이자 색소포니스트로 변신한 회장님 발언에 이어 참석한 회원들 근황 소개가 이어졌다. 공공기관 과장으로 정년을 맞은 P회원은 생태환경 해설사 시험에 합격했다고 해서 축하를 받는다. 머리가 허연 초등교장 출신 J회원은 방통대에서 중문학을 공부하며 대학원 진학을 고려한다는 발언에 학구파는 다르다며 칭송이 이어진다. 고위공무원으로 퇴직한 K회원은 회사 중역으로 번듯한 사무실을 갖고 있어 부러움의 대상이었다.

거의 끝나갈 즈음 서귀포시장을 지낸 P회원 차례가 되었다.

차기 도지사나 국회를 넘보며 바쁘게 사는 줄 알고 모두 주목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그의 입에서 나온 근황소개는 뜻밖이었다. 교회에서 시간대별로 신도들 주차봉사 하느라 바쁘게 살고 있다는 얘기, 그 밖 시간은 건강을 위해 산책에 시간을 할애하고 있다며 겸손하게 끝을 맺는다. 봉사활동을 하고 있다는 그의 말은 의외였으며 내 허황된 생각에 일침을 가하기에 충분했다. 그렇다. 은퇴자들은 별들을 빛나게 하는 까만 하늘처럼 누군가의 배경이 되며 살아갈 때 아름다울 수 있다. 주인공이 아닌 나머지가 되고 누구의 배경만 되면서 살아간다는 것이 어디 그리 쉬운 일일까만 집착만 내려놓을 수 있다면 가능한 일이 아닐까? 여름의 끝자락에서 다시 한 번 내 삶의 모습을 되돌아보는 계기가 되었다.

처서가 지나서 일까? 가을 전령사 귀뚜라미 소리가 내 뜨락에 한 가득이다.

초록이 성성하던 나뭇잎들도 곧 자리를 비울 준비를 하는 듯 보여 허허롭기 그지없다. ()에서 비롯되는 걱정은 집착과 탐욕에 있다고 부처가 가르치듯 떨어질 준비를 하는 나뭇잎들도 비움이 아름답다는 진리를 가르치려는 건 아닐까? 집착과 탐욕이 우리를 병들게 하고 있다. 이제 비움으로써 채워지는 삶의 진리를 깨닫고 내 삶 좌표도 다시 설정해야 하지 않을까 싶다. 오늘 밤 빈센트 반 고흐의 밤하늘이 내 뜨락에 무수히 쏟아져 내린다. 곧 가을이 들판으로 달려와 우리를 맞이할 것만 같다.

이 가을 집착과 탐욕을 내려놓고 우리 모두 별들이 빛날 수 있도록 밤하늘에 까만 배경이 되어보는 건 어떨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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