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영곡 고득종 자제들 문신으로 출사…백성들에게 선정
(55)영곡 고득종 자제들 문신으로 출사…백성들에게 선정
  • 고동수 기자
  • 승인 2018.09.1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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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태욱, 추자 어민 항일항쟁 참여
고태익, 부교리·형조좌랑 등 역임
고태정, 편수관·상의원정 등 지내
고태필, 한성부 좌윤 등 역임해
고택겸, 탐라국 삼을나의 예관
고택수, 서울대 의대 졸…외과의
1929년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한 ‘생활상태조사’에 실려 있는 삼성사의 모습(사진 위쪽). 탐라 발상지인 삼성혈의 삼성사를 배경으로 사람들이 한 줄로 늘어서 있다. 정조 9년(1785)에 양경천의 상소로 삼성사 사액이 내려졌으며 교리 고택겸이 어제제문을 받들고 와서 봉제했다. 아래 사진은 삼성혈에서 대제를 봉행하는 모습으로 초헌관의 머리에 쓴 관모가 이 제례가 예사로운 제례가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1929년 조선총독부에서 발간한 ‘생활상태조사’에 실려 있는 삼성사의 모습(사진 위쪽). 탐라 발상지인 삼성혈의 삼성사를 배경으로 사람들이 한 줄로 늘어서 있다. 정조 9년(1785)에 양경천의 상소로 삼성사 사액이 내려졌으며 교리 고택겸이 어제제문을 받들고 와서 봉제했다. 아래 사진은 삼성혈에서 대제를 봉행하는 모습으로 초헌관의 머리에 쓴 관모가 이 제례가 예사로운 제례가 아님을 보여주고 있다.

고태욱高泰旭1894(고종31)~?, 추자 어민들의 항일활동. 추자면 영흥리<-무기> 태생이다.

193278일 광주지방법원 제주지청에서 수형자 중 김봉수金奉守(35)·박병석朴炳碩(34) 등은 징역 7개월을, 김기형金奇馨(28)·이사문李仕文·추남수秋南洙(31)·김득수金得守(33)·박천석朴千石(36)·원일개元一凱(31)·고일주高日柱(43)·원용현元容賢(39)·박복순朴福順(42)·고태욱高泰旭(38) 10명은 징역 6월에 집행 유예 2년을 선고받았다.

고태익高台翼문신, 자는 문좌文佐, 본관은 제주이며 영곡 고득종高得宗의 넷째 아들.

1454(단종2)에 문과에서 정과丁科로 급제하고 대사성大司成이 되었고, 1459(세조5) 8월에 부교리가 되었다.

1469(예종1) 8월에 형조정랑에서 형조좌랑이 되고 1479(성종10) 11월에 임금이 경기도 부평부사富平府使로 있는 그에게 말하기를 수령은 누구보다도 친민親民하여 백성들의 걱정과 한탄함이 없도록 함은 물론, 더욱 청렴결백하여야 한다.”고 하였다.

고태정高台鼎문신, 춘추관, 편수당 봉상시정, 성균관 사성, 자는 기유箕臾, 본관은 제주.

영곡 고득종高得宗의 둘째 아들 고태필의 아우로 태어나 1459(세조5) 41일 문과에서 을과로 장원급제했다.

이때 임금이 그의 책문策文을 보고 장원급제시켜 편수관·장악원정掌樂院正, 춘추관, 편수당 봉상시정 등을 역임했다. 1470(성종1) 6월 상의원정尙衣院正이 되었다.

 

탐라국을 개국한 삼신인 삼을나 위패가 봉안된 삼성전의 현판. 사진=고양부삼성사재단 제공
탐라국을 개국한 삼신인 삼을나 위패가 봉안된 삼성전의 현판. 사진=고양부삼성사재단 제공

고태필高台弼문신,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2등에 책록, 본관은 제주, 고말로高末老16세손, 영곡靈谷 고득종高得宗의 장남으로 태어나 음직蔭職으로 전라도 광양의 수령이 되었다.

처음 제주동남 감목관 고준高俊의 딸을 아내로 삼았다. 1451(문종1) 증광문과에 정과丁科로 급제, 1455(세조1) 좌익원종공신佐翼原從功臣 2등에 책록이 되었다.

1468년 이조참판이 되어 야인들의 정벌에 공을 세워 왕으로부터 100냥을 하사받았으며, 다시 북경에 가서 전에 포로로 잡았던 사람들을 돌려보내고 돌아왔다.

1470(성종1) 4월에 전라도관찰사로 나갔으며, 147210월에 떠났다.

곧 경기도 포천현감으로 나아갔고, 같은 해 우헌납이 되고, 1465년 청주목사로 나아가 정사에 부지런해 아전들은 두려워하고 백성들은 편안히 여겼다.

이듬해 삼포효유부사三浦曉諭副使가 되어 나가 뇌거사목賚去事目에 의거해 왜인들을 회유했다.

1467년 대사성으로서 주문사가 되었고, 특명으로 가선대부에 승진하였으며 곧 행부호군으로서 명나라에 다녀왔다.

이때 주문사奏問使로서 삼포왜란三浦倭亂에 대한 전과를 보고하였다. 1472예종실록의 수찬에 참여한 공으로 말 1필을 하사받았다. 같은 해 동지중추부사 겸 황해도관찰사가 되어 나갔으나 어머니가 늙었음을 이유로 곧 사직했다.

1479년 첨지중추부사에 이어 한성부 좌윤이 되었다. 이듬해 첨지중추부사로서, 제주도에서 진주 앵무배眞珠鸚鵡盃를 바치자, 이것은 백성들에게 폐를 끼치는 것이라 해 이를 금해 줄 것을 왕에게 건의하여 허락을 받았다. 벼슬은 개성유수까지 이르렀다.

1493(성종 24) 8월 전 개성부유수 그는 양전量田과 국둔마國屯馬의 관리 문제, 마정馬政·군정軍政·농정農政 등에 대한 건의서를 올려 제주 발전에 대한 관심이 매우 컸다.

고택겸高宅謙1732(영조8)~?, 문신. 북평사北評事, 제주 삼을나三乙那의 예관禮官. 자는 사능士能, 호는 죽은재竹隱齋.

고택겸의 본관은 장흥, 전남 담양에서 의병장 고경명高敬命 장군의 8대손, 고만욱高萬旭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1780(정조4) 식년 문과에서 병과丙科로 급제했다.

처음 제주 사람 양경천梁擎天이 함북 길주에 귀양을 갔다가 풀려 귀향하는 길에 조정에 진언해 사액을 요청한 것이 주효된 듯하다.

사액賜額 이후의 절목은 삼성사에 현판으로 보존되어 있다. 그에 대한 행장은 아들 고시휴高時休가 지어 오늘에 전해진다.

홍문관 교리를 지내고 북평사北評事로 경연經筵에서 임금에게 강의할 때에 나무는 먹줄을 똑바로 그어 깎아야 곧아지고 임금은 바른 말을 받아들일 줄 알아야 어진 임금이 된다.”고 말해 언로를 개방해 어진 선비를 맞아들여야 태평을 이룩할 수 있는 길이라고 했다.

이에 임금이 사랑하고 특별히 주자의 사운시四韻詩를 차운次韻으로 하여 이문원摛文院에 게시하라고 명했다.

1785(정조9) 봄에 조정에서 고양부 삼을나 묘호廟號를 삼성사라 어필로 써서 내리자 그 후 행할 절목을 정하여 그를 예관으로 명하니 내도해 제사를 지냈다.

고택수高宅洙1930(일제강점기)~?, 개업의사, 제주고씨 전서典書공 예남공파, 애월읍 하가리(-더럭)에서 고우석高友碩의 큰아들로 태어나 제주농업중학교 제39회로 졸업했다.

우리나라 해방 이후 서울대학 의과대학 졸업 제1, 일본 교토<京都>대 대학원 의학박사를 획득, UN군사령부 D.E.C. 의무 고문, 서독병원과 근무, 그를 뒷바라지에 헌신한 어머니 좌춘생左春生(금성)의 힘이 컸다.

1962년에는 일본 교토의과대학부속병원 제2과에서 수술에 대한 수련을 쌓았다. 1964년에 제주시내 삼도동에 고택수의원을 개업해 외과의사로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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