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4)집안의 안위를 위해 돌담을 쌓으며 비보(裨補)했다
(94)집안의 안위를 위해 돌담을 쌓으며 비보(裨補)했다
  • 제주신보
  • 승인 2018.09.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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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녕리 남흘동에 있는 부부 용묘
용호절비 형…새각담, 기운 다스려
석물은 모자 쓰고 방망이 든 형상
제주시 김녕리 남흘동 동쪽 밭에 있는 통정대부 황순웅 부부 무덤. 자손들에 의해 관리가 잘 돼 있어 무덤 분위기가 곱고 정갈하게 느껴진다.
제주시 김녕리 남흘동 동쪽 밭에 있는 통정대부 황순웅 부부 무덤. 자손들에 의해 관리가 잘 돼 있어 무덤 분위기가 곱고 정갈하게 느껴진다.

행복과 불행의 위정자 잠언

무덤을 ()’이라고 하는 것은 제주에서만 부르는 말이다. 진나라 때 황제의 무덤을 산()이라고 불렀던 데서 유래하지만 왜 유독 제주에서만 이라고 하는지 상고(詳考) 할 일이다. 산은 봉긋한 봉분을 말한다.

제주에서는 해마다 음력 팔월 초하루를 전후해 무덤에 자란 풀을 베는 벌초를 한다.

가끔 땀을 식혀주는 산들바람이 불 때면 무덤에 자란 새()의 초록 물결은 누웠다 일어나기를 반복하며 넘실댄다.

()는 아무리 강한 바람이 불어도 부러지는 법이 없다. () 가운데 가장 현명한 것이 침잠(沈潛) 하여 부드러움으로 강함을 이기는 것[强克]이 떠오르기도 한다.

서경(書經)’, 사람에게는 다섯 가지 복된 것[五福]과 여섯 가지 형벌[六極]이 있는데 지금 시대에 다시 이 말을 되새겨 볼 만하다.

오복은 인생에서 행복한 일들인 데, 첫째가 오래 사는 것이고, 둘째가 부유하게 되는 것이다. 셋째가 편안하게 사는 것이고, 넷째가 훌륭한 덕을 닦는 것이며, 다섯째가 늙도록 산 뒤에 생을 잘 마치는 것이다.

육극(六極)이란 인생의 형벌 즉, 비극에 해당하는 것들인데 인간사에서 쉽게 피하기 어렵다.

첫째, 횡사(橫死) 하거나 일찍 죽는 것이고, 둘째가 병드는 것이다. 셋째가 근심하게 되는 것이고, 넷째가 가난하게 되는 것이며, 다섯째가 흉악하게 되는 것이며, 여섯째가 약하게 되는 것이다.

사실 행복하거나 불행하거나 이것들은 우리 주변에 흔한 사회적 현상들이다.

흙수저, 금수저라는 것도 이것의 요인이 되는 기로(岐路)에 선 현대인의 풍자가 아닌가. 누가 행복을 마다하고 불행을 선택 할까. 중국 춘추 전국시대는 차라리 은둔을 선택한 사람들이 많았고, 일본 에도 막부시대에는 허무주의가 만연해 인생의 덧없음을 한탄하기도 했다.

한국의 역사에는 서얼과 천민, 여성의 한()이 시퍼렇게 서렸으며, 변방 제주에서는 사람답게 살려고 봉기를 일으키고, 살기 위해 고향을 등져 도망을 선택하기도 했다.

세상을 살수록 산다는 것이 점점 더 계급적이라는 생각이 든다. 수직적으로 빈부가 차이나는 계층 간격 말이다. 더 이상 개천에서 용이 날 리도 없으며, 웬만하게 일해서는 살기도 어려워 행복할 수 있는 길이 멀기만 하다.

그래도 위안컨대 민()은 어려운 일을 겪으면서도 나름의 자가(自家) 처방으로 살아왔고 내내 그렇게 살아갈 것이다.

어쩌면 서경(書經)’의 이 잠언(箴言)도 권력자가 만들어낸 과거의 통치용 담론에 불과한지도 모른다.

왕실사대부(王室士大夫) 처럼 살아가는데 시대적 조건이 좋은 사람에게는 당연하게 행복이 훨씬 가까운 것이고, 반대로 일자리도 어려운 민간 다중(多衆)에게는 언제라도 불행이 더 가까울 수 있는 위치에 놓일 수 있다.

 

황순웅 무덤의 문인석과 망주석.
황순웅 무덤의 문인석과 망주석.

황순웅 무덤

김녕 마을은 매우 오래된 마을이다. 사람들이 오래전부터 터를 일궜고, 고려시대에는 제주의 몇 안 되는 대촌(大村)이었다.

지금도 마을 곳곳에서 다양한 자기(瓷器) 파편들을 쉽게 찾을 수 있어 유서 깊은 마을이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녕 사람들은 다른 마을 사람들보다 더 부지런하다. 필자의 경험으로 보면, 오몽(움직일 수 있을 때) 할 수 있는 사람들은 밭이나 바다에서 무슨 일이든 놀지 않고 일하며 아침 일찍부터 하루 종일 집을 비우는데도 놀라운 사실은 집집마다 대문을 닫지 않고 항상 열어 둔다는 것이다.

또 무덤 관리에서부터 산담, 비석까지 잘 갖추어 있어 조상에 대한 숭조 사상이 다른 지역보다 매우 높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김녕리 남흘동 동쪽 밭에 눈에 띄는 무덤이 하나 있다. 언제 봐도 그 무덤은 매우 정갈해 자손들이 참 무덤 관리를 잘 하고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다.

석상도 다른 무덤의 양식하고는 달라 매우 특이하다.

묘주는 통정대부 황공(通政大夫黃公)과 유인 거창 신씨(孺人居昌愼氏)이다.

창원(昌原) 황씨 입도조는 만호(萬戶, 4)를 지낸 통정대부 황로(黃虜)공으로 무관을 지내다 한양에서 제주로 낙향해 향년 83세까지 살았다. 부인은 숙부인 황보씨이다.

황순웅(黃順雄)은 입도 6세로 아버지는 기홍(起弘)이고 2남에 차남으로 형은 순창(順昌)이다.

황순웅(黃順雄)의 비문을 보니 부인 먼저 세상을 떠나보냈다.

부인 신씨는 17341230일 신시(申時, 오후 3~5시 사이)에 태어나 181769일 축시(丑時, 오전 1~3시 사이)에 돌아갔다.

부군(夫君)은 통정대부 창원 황공 순웅(通政大夫昌原黃公順雄)으로 슬하에 42녀를 두었다.

아들 넷을 낳았으나 큰 아들과 둘째, 넷째 아들이 일찍 돌아갔는 데 셋째만 살아 사과(司果, 무관직 정6) 벼슬을 지냈다. 부인은 1025일 묘시(오전 5~7)에 문선밭(立門田) 해좌(남남동 방향)에 묻었다.

황순웅(黃順雄)1735220일 신시(3~5)에 태어나 1829(도광 을축)913일 신시에 향년 95세로 세상을 떠났다. 장례는 같은 해 1018일 축시(오전 1~3)에 부인 오른쪽에 묻혔다.

부인 신씨 또한 83세를 살았는 데 94세 천수(天壽)를 누린 남편 황공과 마찬가지로 당시로서는 드물게 장수했고, 아마 통정대부도 수직(壽職)일 것이다. 옥동자 아들 셋을 아이들 약관(弱冠)에 잃었으니 부모의 슬픔이야 어찌 말로 다 표현하랴.

제주의 어머니들이 말하는 살암시민 살아진다라는 말은, 부모의 입장에서 삶을 포기한 체념이 아닌, 힘든 세월을 이긴 초탈의 표현이라고 해야 맞겠다.

 

주변 밭에서 나온 청자 분청 백자 파편.
주변 밭에서 나온 청자 분청 백자 파편.

황공 부부 무덤의 비보풍수

부모보다 자식이 먼저 세상을 떠나보내면 참으로 비통할 것이다. 그래서 장수한 어머니와 천수를 다한 아버지는 유언으로라도 황씨 집안의 안녕을 비라고 대를 잇고자 노력했을 것이다.

그래서 나중에 서거한 황순웅은 무덤 자리를 자신의 부부와 마찬가지로 후손들의 장수를 비는 마음으로 성의를 다해 마련했을 것이다.

그래서 무덤 자리의 방위를 결정하고 방위에 부족한 부분을 비보의 방법을 택해서라도 오로지 장생(長生)을 원했다.

황공 부부의 무덤을 잘 보면 다른 무덤에서 볼 수 없는 형식을 볼 수 있다.

바로 돌담을 이용한 비보압승(裨補壓勝)으로, 용호절비(龍虎折臂)의 방법이다. 용호절비란 좌청룡과 우백호가 어느 한 쪽, 혹은 두 곳 모두 그 형세가 잘린 것을 말하는 데 잘라진 부분이 무덤에서 보이지 않도록 복구하거나 나무를 심어 가려야 하는 것을 말한다.

황공 부부의 무덤은 좌청룡은 입산봉이고 우백호는 부모슬 동산인데 입산봉의 좌청룡도 그 형세가 짧고, 부모슬 동산 또한 그 흐름이 흐르다 끊어져 산담 좌 ·우측 뒷부분으로 새각담을 올려쌓아 형기(形氣)를 다스리고 있다. 부모슬 동산은 한라산으로부터 흘러온 거대한 용암 줄기로 투물러스가 만든 동산이다.

또한 무덤 좌향의 뒤편은 바다여서 북서풍의 풍살(風殺)에 노출되고 있어 이를 방비하기 위해 산담 위에 다시 겹담으로 새각담을 쌓았다.

이 무덤의 위치에서는 묘산봉 남동쪽으로 물이 흘러들어오는 입수(入首) 위치이고 한라산 동북쪽 능선의 기운이 흘러들어 묘산봉의 형기를 도와주는 방위가 되므로 좋은 기운이 쇠퇴하지 않는다.

바람코지에서 무덤에 풍살이 들지 않고 풀이 곱고 왕성하게 잘 자라는 것은 비보함으로써 기맥과 혈토(穴土)가 살고, 장풍(藏風)이 되고 배수(排水)의 요소가 좋다는 말이다.

석물은 모자를 쓰고 방망이를 든 형상이고, 망주석은 당당하게 무덤 위치를 밝히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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