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99년 성역화 사업 시작…사료 수집·연구 필요
무오 법정사 항일운동(1918년 10월 7일)은 제주 최초의 항일운동이자 종교계를 중심으로 지역 주민들이 일으킨 전국 최대 규모의 무장항일운동이다. 올해로 100주년을 맞았지만 지금까지 제주에서 발생한 조천만세운동(1919년 3월 21일) 물론 해녀항일운동(1932년 1월)보다 주목을 받지 못하고 있다. 본지는 무오법정사 항일운동 100주년을 맞아 이 운동이 갖는 역사적 의미를 짚어본다.【편집자 주】
▲제주 최초·최대 무장항일운동
3·1운동보다 5개월 먼저 일어난 제주 최초 최대의 항일운동이자 1910년대 종교계가 일으킨 전국 최대 규모의 무장항일운동이다.
법정사 주지 김연일 스님 등 30여 명은 1918년 5월부터 거사 계획을 추진하면서 ‘우리 조선은 일본에 탈취 당해 괴로워하고 있다…10월 7일 오전 4시 하원리에 집합하라. 그래서 8일 대거 제주향(제주시)을 습격해 관리를 체포하고 보통 일본인을 추방하라’는 내용의 격문(檄文)을 작성해 주변 각 마을 구장을 통해 주민들에게 돌렸다.
이틀에 걸친 항일 항쟁에 참여한 자는 약 700명(일정기록 400명)에 이르렀다. 무장항일운동에 참여한 인사들은 제주경찰서 중문주재소를 습격해 주재소장을 포박하고 주재소를 방화·전소 시켰다.
이 운동으로 주요 가담자 66명이 광주지방법원 목포지청으로 송치돼 48명이 소요보안법 위반으로 기소됐다.
재판 전에 2명이 옥사했고, 재판을 통해 31명이 징역형, 15명이 벌금형을 받았다. 징역형을 받은 자 중에서 3명은 감옥에서 옥사했다. 일본 경찰은 이 사건의 파급을 우려해 운동의 주도세력을 혹세무민(惑世誣民)의 유사(類似) 종교 단체로 규정했다.
이 운동은 3·1운동 이전 일제에 항거한 단일 투쟁으로는 최대 규모였다는 점에서 그 의의는 매우 크다. 특히 이 항쟁은 단순한 종교적 차원의 운동이 아니라 일제의 경제적 침탈에 대한 제주도민의 항일투쟁이며 국권 회복 운동이었다.
▲항일운동 재조명
무오법정사 항일운동의 성격은 광복 이후에도 한동안 불온한 사상을 가진 보천교도들이 무장봉기해 사회적 불안을 야기한 ‘보천교도의 난’으로 폄하됐다. 실제로 1994년까지 도내에서 발행된 각종 자료에도 ‘보천교도의 난’으로 소개됐다.
왜곡된 사건의 진실은 지역 주민 26명으로 구성된 가칭 ‘법정항일운동사업추진위원회’가 1994년 10월 서귀포시에 제주 최초이자 최대의 항일운동 발원지인 법정사 일대를 성역화하는 사업을 해 달라는 청원서를 제출하면서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법정항일운동사업추진위원회는 청원서를 통해 ▲형사처벌된 우국지사들에 대한 명예 회복 ▲제주도지 등에 표기된 ‘보천교도 의거’, ‘보천교 사건’ 등의 표현 수정 ▲법정사 일대 성역화 사업 추진 ▲유족 및 지역주민들의 명예 회복 등을 요구했다.
이후 중문청년회의소는 광복 50주년을 맞은 1995년 8월 15일 ‘제1회 법정사항일항쟁만세대행진’ 및 학술토론회를 개최했고 이후 매년 무오법정사 항일항쟁 기념식을 열고 있다.
▲법정사 성역화 사업
항일운동의 발상지인 법정사는 서귀포시 하원동 ‘법정악’ 능선 해발 680m 지점에 있다. 법당은 우진각(네 면에 면이 있는 구조) 지붕의 ‘초당(草堂)’이었다.
면적은 87.3㎡의 작은 절이었으나, 당시 항일지사들의 체포와 동시에 일본순사들에 의해 불태워졌고 지금은 축담 일부 등 건물 흔적이 남아있다.
주변에는 우물터와 법회용 야외 단이 있다. 무오법정사 항일운동 성역화 사업은 1999년 12월 기본실시설계가 이뤄지면서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2003년 11월 무오법정사 항일운동 발상지 일대 18만9940㎡가 제주도지정 문화재 보호구역으로, 법정사지(址) 일원 4만406㎡는 문화재 지정구역으로 지정됐다.
성역화 사업에 따라 2004년까지 총사업비 38억원이 투자돼 관리사, 화장실, 주차장, 산책로, 전망대, 상징탑을 비롯해 애국지사와 항일지사 66인의 영정을 모신 의열사가 조성됐다.
▲향후 과제
무오법정사 항일운동이 올해로 100주년을 맞았지만 여전히 사회적 관심을 받지 못하고 있다. 운동의 성격이나 규모에 비해 기념 사업도 지지부진한 실정이다.
법정사지 주변에는 출입을 막는 밧줄과 함께 안내문이 설치된 게 고작이다.
성역화 사업에 투자된 예산은 지금까지 44억8500원에 그친 가운데 수년째 추가 사업이 진행되지 않고 있다. 일부에서는 미발굴 자료 수집을 통해 당시 이 운동에 가담했다가 체포됐던 66명 외에도 거사에 참여했던 인물을 발굴, 유족을 통해 당시 자료를 확보해 자료집으로 발간해야 한다는 지적도 나오고 있다.
제주도문화재전문위원으로 활동했던 윤봉택 서귀포예총 회장은 “성역화 사업은 단순히 건물을 짓고 주변을 정비하는 것만으로 마무리돼서는 안 된다”며 “항일정신을 구현하고 이를 전승시키기 위한 프로그램 개발을 위해 각종 사료를 추가로 수집하고 연구하는 작업이 필요하다”고 말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