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주도는 하루아침에 유명해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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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정옥, 서귀포의미래를생각하는시민모임 공동대표/논설위원

‘만남만 싯곡, 이별은 어서시민 조키여’라며 손자의 손을 놓지 못하는 할머니. 추석연휴, 둘째 날 도착한 손자는 마지막 날 아침 일찍 집을 나섰다. 96세 할머니는 ‘언제 다시 볼 거냐’며 눈시울을 적셨다. 남들은 5일이라는 연휴를 이틀 같은 3박4일로 서둘러 떠나는 아들. 그렇게 기다렸던 우리의 추석은 그리움만 남기고서 끝나버렸다. 명절마다 애간장을 태우는 비행기 표가 그저 야속할 뿐. 그 많은 표는 누가 다 가져갔을까?

관광협회에 따르면 추석연휴 동안 항공편은 국내선 1141편에 22만2000석, 국제선 106편에 2만석 정도 투입되었다. 이들을 차지한 22만5000명의 관광객이 밀물져 들어왔다. 첫날에만 5만 명이 몰렸다. 예상보다 5000명이 늘었단다. 제주도민에겐 첫날 비행기 표가 닿을 수 없는 하늘의 별이었다.

그렇지만 지난해보다 관광객이 많아졌다고 좋아하는 옆 집 펜션 아저씨를 보는 건 즐거운 일이다. 이따금 강원도에 밀리기도 하지만 스카이스캐너가 분석한 바, ‘제주도가 우리나라 최고의 인기 여행지’인 것은 신나는 일이다.

중죄인이 귀양 오던 절해고도, ‘출륙금지령’으로 갇혀 살던 제주도가, 어쩌다 이렇게 유명해졌을까? 1930년대, 제주도에 여행 왔던 시인 조명암은 서귀포에서 발걸음을 멈췄다. 철썩이는 파도와 물새, 해녀들이 심금을 울렸다. 일류 작사자였던 그는 이들을 모아서 ‘서귀포 칠십리’를 지었다. 여기에다 불후의 작곡자 박시춘이 곡을 붙이고, 최고의 가수 남인수가 노래를 불렀다. 가요는 일제치하에서 설움조차 눌러가며 살아가던 국민들에게 따뜻한 향수와 애틋한 그리움을 자아냈다. 바야흐로 서귀포가 국민들에게 알려지기 시작했다.

1950년대, 초록바다와 밤하늘, 동백꽃 들을 엮어서 ‘서귀포 사랑’이 만들어졌다. 이 노래는 ‘청실홍실’로 유명한 송민도에게 건네졌다. 그녀의 이름만큼이나 사랑받은 노래는, 이후에 백설희와 조영남이 다시 부르면서 서귀포를 재삼 알리는 애창곡이 되었다.

1960년대, 해녀와 뱃노래 등을 모아서 정두수가 ‘서귀포 바닷가’를 작사했다. 그는 마포종점 등을 낳은 전설의 작사자다. 여기에 박시춘이 곡을 붙이고 이미자가 노래하면서 서귀포는 온 국민의 가슴속으로 스며들기 시작했다.

1970년대, 정태권은 밀감향기, 한라산 등에 반해서 ‘서귀포를 아시나요’를 남겼다. 당시의 톱 가수 조미미가 부른 노래는 방송국 인기 차트 1위를 기록했다. 음반이 100만장 가량 팔렸고, 서귀포는 전국적으로 유명해졌다.

1980년대부터 감귤과 중문단지, 관광지들이 바통을 이었지만, 오민우의 내고향 서귀포, 혜은이의 서귀포의 꿈 등이 꾸준하게 서귀포를 알렸다. 장담컨대 서귀포가 없었다면 제주도의 관광지화는 여의치 않았을 게다. 그러나 이 모든 노래들을 차치할 만큼 제주도를 격조 있게 만든 건, 장일남 곡 ‘기다리는 마음’이 아닐까 싶다. ‘일출봉에 해 뜨거든 날 불러주오’를 부르면서 한국인들은 지구본의 어디에서나 이별의 아픔과 실향의 설움을 달랬을 터다.

그 일출봉이 목하 제주관광을 선도하고 있다. 관광지 입장객 통계에서 1위를 달린다. 하지만 명절 중 들른 일출봉은 몸살을 앓고 있다. 쉼 없이 오르내리는 관광객을 떠받치느라 정강이 밑으로 낙석들이 널브러졌다. 일출봉의 신음은 파도에 묻히고, 광치기 해변에는 쓰레기가 나뒹군다.

제주도는 하루아침에 유명해지지 않았다. 하지만 지금처럼 짓밟힌다면 어느 날 순식간에 버려지리라. 제주의 매력은 신의 숨결이 서린 태초의 자연이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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