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6)은둔의 세월 이기고, 척박한 땅에서 일가를 이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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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제주신보
  • 승인 2018.10.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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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양전씨 시조 전득시 17세손…일찍 벼슬 올랐으나 은거 위해 제주 입도
사대부 묘제 모방한 3단계 묘지…구비석은 귀부원수 형태로 조면암 사용
제주시 아라동에 있는 전남의 묘역. 3단계로 이뤄진 묘역으로, 구비석에 놓인 좌대는 현무암으로 만든 거북이 모양이다.
제주시 아라동에 있는 전남의 묘역. 3단계로 이뤄진 묘역으로, 구비석에 놓인 좌대는 현무암으로 만든 거북이 모양이다.

담양전씨 세략()

충청도 담양 전씨 가문은 충렬왕 원년(1275) 10월에 전득시가 문과에 장원하자 서울로 진출해 담양군에 봉해지게 된다.

이를 계기로 전득시는 담양을 관향으로 하는 전씨의 시조가 되었는데 야은 전녹생, 뇌은 전귀생, 경은 전조생은 그의 7세손이 되고 담양 전씨 제주 입도조 전남은 전득시의 17세손이 된다.

묘지의 비석을 보면, 전남(田男)은 벼슬이 어모장군행훈련원첨정(禦侮將行訓鍊院僉正)에 이르렀다. 위에서 말한 고려 때 좌복야참지정사高麗左僕射參知政事) 충원공(忠元公) 전득시(田得時)가 그의 시조이다.

전남의 조상은 대대로 벼슬을 했는데 고려가 망하자 불사이군의 충절을 보였다. 여말 문원공(文元公) 경은(耕隱) 선생 전조생(田祖生)은 배움에 있어서 맏형으로 야은(埜隱) 전록생(田祿生), 둘째 형에 뇌은(耒隱) 전귀생(田貴生)과 더불어 주자학을 바르게 삼아, 고려 말에 충절을 다한 이름난 선비로 세상에 알려지기를 전씨 3은 선생이라고 말한다.

문원공 경은 선생에게는 네 명의 아들이 있는데 둘째가 전엄(田渰)으로 벼슬은 통선랑(通善郞, 문관 정5)과 보령현감(保寧縣監)으로 전한다.

전엄의 손자 전실(田實)의 호는 구재(龜齋)이며 봉정대부행고령현감(奉正大夫行高靈縣監)이고, 전승관(田承灌)은 벼슬이 정략장군행용양위부사정(定略將軍行龍驤衛副司正)으로 문원공이 그의 7세조가 된다. 전남(田男)의 고조는 전광옥(田光沃)이고 증조는 전적(田積)이며 할아버지는 효윤(孝胤)이고 아버지는 전억추(田億秋)이다. 아버지 무덤이 충남 홍성군 홍동면에 있는 것으로 보아 그 지역을 중심으로 전씨 집안이 흥성했던 것이다.

전남은 만력 28(1600·조선 선조 33) 경자(庚子) 824일에 태어났다. 전남은 충청도 홍성(洪城)에 살면서 일찍부터 벼슬길에 올랐으나 큰 뜻을 펴지 않고 조상을 남겨두고 은거(隱居)코자 제주에 건너와 입도조가 되었다.

부인 제주 고씨 사이에 12녀가 있는데 아들은 전익방(田益邦)으로 어모장군과 장낙원(掌樂院) 주부(主簿, 6)를 지냈다.

딸은 경주인 김헌(金憲, 1626~1698)에게 시집갔는데 오위도총관 김만일의 증손이다. 김헌의 아버지는 김인(金磷)이며, 할아버지는 김대명(金大鳴)으로 김만일의 장남이 된다. 전남은 조선 헌종 11년 경술 521일에 향년 71세로 세상을 마쳤다.

전씨 3

야은(埜隱) 전녹생(田祿生)의 자는 맹경(孟耕)이다. 과거에 급제해 벼슬이 문하평리(門下評理)에 이르렀다. 시호는 문명공(文明公)이다.

저서에 야은일고(野隱逸稿)’가 전해온다. 뇌은(耒隱) 전귀생(田貴生)은 삼사 좌윤(三司左尹)을 지냈다. 증손은 가식(可植)인데 문과에 장원해, 예조 판서를 지내고, 영의정에 추증되었다. 가식의 현손(玄孫) 좌명(佐命)은 효행으로 관직에 나아가고 정려(旌閭) 되어 우의정에 추증되었다. 좌명의 딸이 우의정 영원부원군(鈴原府院君) 평정공(平靖公) 윤호(尹壕)에게 출가해 정현왕후(貞顯王后)를 낳아 성종대왕의 배필이 되니 중종대왕의 어머니다.

경은(耕隱) 전조생(田祖生)은 공조 전서(工曹典書)를 지냈고, 큰 인재로 당대에 존망(尊望)이 있었다.

공민왕이 경은(耕隱) 선생은 매우 중하게 여겨 중국의 곽광(霍光)과 제갈량(諸葛亮)으로 기대했다고 전한다. 경은(耕隱)은 포은(圃隱) 정몽주와 친해 도의(道義)를 맺었는 데 조생이 죽자 정몽주가 꿈속의 경은 선생[夜夢耕隱先生]’을 지어 큰 재목이 국가를 부지하고 있네[大材扶明堂]”라고 칭찬했다.

영조 14(1738) 3월에 후손 통정대부행칠곡도호부사(行漆谷行都護府使) 전일상(田日祥)야은일고(野隱逸稿)’에 대해 세상에 알려지지 않음을 한탄했다. “우리 야은 선생은 의리로 중화와 오랑캐를 변별해 우뚝 큰 절개를 세워 천하 후세에 말이 있게 했으며, 우리 경은(耕隱) 선생은 성대한 큰 재목으로 나라를 부탁하기까지 하여 우리 동방의 유종(儒宗)으로 일컬어졌는데, 홀로 뇌은(耒隱) 선생만은 국사나 가승(家乘)에 인멸(湮滅) 되어 일컫는 내용이 없었다.

그러나 안으로는 어진 손자가 종백(宗伯)이 되었고, 외손에서는 성녀(聖女)로 국모가 되었으니, 그 숨은 덕행이 후세에 발현된 징험이라 하겠다. 효자가 대를 이어 나고 처사가 곧음을 지켰으니 가히 대를 이어 아름다움을 이룩했다고 할 만하다.”

 

술잔을 바치는 동자석.
술잔을 바치는 동자석.

전남의 묘제(墓制)

전남의 생몰연대가 헌종(憲宗) 18(1670)이니, 묘지의 조성 시기가 17세기 중후반이다. 전남의 묘지는 육지의 사대부 묘제를 본받고 있다.

물론 왕릉의 축소판으로써 사대부 묘지도 3단계 구성인데 3단계 구성이라고 함은 계절(階節)을 초계(初階, 또는 上階), 중계(中階), 하계(下階)로 나누는 것이다.

먼저 초계에는 상석과 비석을 두고, 중계에는 동자석을 쌍으로 놓으며, 하계에는 문인석을 두 기 서로 마주 보게 세웠다.

전남의 입도 시기가 30대 청년기였다고 해도 40년 후에 그가 사망하자 가족들이 육지의 묘지 제도를 채용한 것이다.

전남의 봉분은 원묘로 산담을 둘렀다. 원래 초계에 세워졌던 구비석은 귀부원수(龜扶圓首) 형태로 조면암을 사용했다.

지금은 산담 좌측 앞 구석에 옮겨 세웠다. 구비석의 크기는 높이가 63cm, 넓이 33cm, 두께 9.5cm에 머리가 둥근 원수형이다. 좌대는 현무암으로 만든 거북이 모양이다.

비석 전면에는 禦侮將行訓鍊院僉正公男之墓뒷면에는 生于萬曆二十八年庚子八月二十四日, 卒于康熙九年□□□年庚戌正月二十一日, 享年七十一, 葬于邁之原, □□一男二女, □□현재 세워진 오석의 비석은 1980년대에 세웠다.

중계에 세운 동자석은 망자에게 두 손에 술잔을 올려바치는 형상이다. 동자석 두 기 모두 머리가 쌍계(雙髻)를 지은 전형적인 도교식 동자의 모습이다. 동자석의 돌은 송이석이다. 하계의 문인석은 키가 큰데 복두를 쓰고 허리에 대를 차고 긴 홀을 들고 있다. 현무암으로 만들었다.

무덤의 지형이 남서향이라서 그런지 볕이 좋고 장풍(藏風)이 잘 돼 포근하여 바람을 피할 수 있기 때문에 448년이 지난 석물의 상태가 매우 좋다. 전남의 묘역은 조선시대 제주도 묘제 변천사 연구에 중요한 자료가 된다.

전남의 후손 전영준

제주 종합경기장 한쪽에 담양 전씨 전영준(田永畯)의 비석이 있다. 전영준은 입도 11세로 호는 농은(農隱)이다.

농은은 1872년 아라동에서 전벽(田闢)의 장남으로 태어나 구한말에 제주도 향장 겸 유진장 주사를 지냈으며 일제에 나라에 빼앗기자 주눅 든 젊은이를 위해 어깨를 펴서 뛰놀 수 있도록 자신의 토지 2500평을 기꺼이 내놓았으니 제주도 체육을 위해 이바지한 공이 큰 인물이다.

해방 이듬해 6월에 타계하니 제주 성내 청년들이 구름같이 몰려와 그의 영전에 엎드려 고개 숙였다고 한다.

그의 터전을 기본으로 1952년 제주도청과 공설운동장이 넓게 마련되고 도시 확장으로 제주시청을 물려받으면서 1967년에 다시 아라벌에 공설운동장이 새로 개설되었다.

제주시의원을 지낸 전명종 선생 또한 담양인인데 그의 집안도 4·3의 비극으로 희생이 컸다.

토지가 척박한 곳에서 세대를 이어갔지만 그래도 담양전씨는 선조들의 충절과 의리에 항상 자부심을 갖는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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