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남녀노소 흙과 자갈을 운반…피땀으로 일군 도민 숙원
(62)남녀노소 흙과 자갈을 운반…피땀으로 일군 도민 숙원
  • 고동수 기자
  • 승인 2018.11.1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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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덕신, 뛰어난 권변으로 장군 칭호
권상진, 대정현감·최종신의 후임
권엄, 빈번한 과거제도에 상소제기
권여경, 제주판관·최관 후임 도임
권용식, 도지사…국도 포장 추진
1969년 여름의 일주도로 공사 장면으로, 곡괭이 등을 활용해 공사를 하고 있는 주민들의 모습이 이채롭다. 일주도로 포장공사는 1970년 1월 권용식 지사 때 준공됐다. 출처=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1969년 여름의 일주도로 공사 장면으로, 곡괭이 등을 활용해 공사를 하고 있는 주민들의 모습이 이채롭다. 일주도로 포장공사는 1970년 1월 권용식 지사 때 준공됐다. 출처=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권덕신權德新제주시 용강리<무드-> 태생이며 사람됨이 왜소하면서도 권변權變이 많고 능히 수척이나 되는 높은 담장을 뛰어 넘나들었다. 이 얘기를 흥선대원군이 들어서 즉시 그를 불러들여 재주를 시험하고자 했다.

이에 역사를 명해 권덕신을 누각 밑으로 내던지자 과연 지상에 떨어지면서 직립으로 서는지라 그래서 유격장군遊擊將軍의 칭호를 수여했다.

권상진權尙鎭대정현감. 1763(영조39) 9, 최종신崔宗信의 후임으로 대정현에 도임하고 1765년 윤2월에 떠났다.

권엄1729(영조5)~1801(순조1), 문신. 충청도관찰사, 유배인. 본관은 안동, 자는 공저公著, 호는 섭서葉西. 경기도 포천군에서 태어났으며 아버지는 첨지중추부사僉知中樞府事 권밀權謐이다.

1765(영조41) 식년문과에 갑과로 급제했다. 1773년 지평으로 있으면서 과거를 빈번히 실시하지 말 것을 상소했다가 추자도에 유배되었으나 곧 풀려났다.

1781(정조5)에 헌납獻納이 되고 1790년 충청도관찰사·대사간·공조판서·형조판서를 두루 지냈다. 한때, 강계부사·전라도관찰사, 1795(정조19) 강화부유수 등에 임명되기도 했으나 다시 병조판서로 기용되었다.

그가 한성판윤으로 있을 때 왕의 총애를 받던 태의太醫 강명길康命吉이 민가 수십 호를 옮기는 문제로 몇 차례에 걸쳐 송사를 일으키자 끝내 가난한 백성들을 옮기게 할 수 없다는 판결을 내려 칭송을 받기도 하였다.

권여경權餘慶제주판관. 1604(선조37) 10, 최관崔瓘의 후임으로 도임하고 16071월에 떠났다.

한편 명나라 사신을 위해 제주의 전복을 사는 것이 당시 수천 첩에 이르는 데 차인差人이 반값을 주고 샀다.

무신년(1608년 광해군 즉위년)에 유태감劉太監이 오자, 병판兵判 이정귀李廷龜가 아뢰기를 절도의 백성이 그 보낸 반값도 환수하지 말고 전일에 억무抑貿(남의 물건을 값을 깎아 억지로 사들이는 것)한 손해를 보상하게 하소서.”라고 했다.

권용식權容湜정통 내무 관료, 16대 제주도지사.

충청남도 연기燕岐군에서 태어나 19691024일 제주도지사로 발령되었다.

충청북도 고용원으로 출발해 1961년 충북 서무과장과 내무국장을 거쳐 1966년 충북 부지사로 승진되었다.

국방대학원을 거쳐 1968년 경북 부지사로, 청렴강직하면서도 매사에 치밀해 전임자 구자춘具滋春 지사의 돌격형과는 대조적이었다.

권도백은 고지식하면서도 원칙을 잘 따지는 성품이어서 시장·군수 및 간부회의에서 제발 술 빚 밥 빚을 제 때에 청산, 관청에 술집 여자들이 드나들지 않도록 하라.”고 엄명하기도 했다.

1970120일 박정희 대통령 일가족이 제주에 와서 2일간 체류했다. 첫 날은 5·16도로를 통해 서귀포에 머물렀고 다음 날에는 골프를 즐겼다.

육영수陸英修여사는 세 자녀와 함께 만장굴萬丈窟 등지를 돌아보았다.

같이 동행한 권도백과 도백의 부인 한동신韓東信여사는 비포장도로를 달리면서 국도라는 일주도로가 이렇게 나쁘니 각하께 말씀드려 빨리 포장을 할 수 있게 하십시오.”라고 요청했고, 이를 받아들여 대통령은 귀경 즉시 일주도로 포장비로 2억 원을 배정, 신속히 포장 사업을 촉진시키는 계기가 됐다. 당시 2억 원은 총연장 181의 일주도로 가운데 60를 포장할 수 있는 큰돈이다.

박대통령이 특별교부세 2억을 전격 지원해 주면서 도지사의 발걸음도 그만큼 바빠졌다.

문제는 골재骨材 채취였다. 권도백은 총공사비 64000여 만원 중 20% 가량인 13000만원에 상당한 골재를 주민들의 노력 부담으로 충당하기로 했다.

공사를 통해 혜택을 보게 되는 112개 부락의 주민 95600명을 동원할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시장·군수를 비롯해 도청 국과장은 각자가 맡은 일주도로 포장부분을 기간 안에 완성하겠다는 각서覺書를 써서 제출하라.”고 폭탄지시를 내렸다.

권도백의 이 같은 배수진은 즉각 효력이 나타났고, 부락마다 경쟁적으로 골재 수집운동이 일어나 남녀노소 모두가 주로 들이나 바다 또는 밭에서 수집해 운반했다.

권도백은 기자회견 석상에서 기일 내 완공 못하면 전원 사퇴하겠다는 각서까지 내보였다.

320일 박대통령은 제주항에 건설된 1화력발전소 준공식에 참석차 내도, 다시 한 달만의 제주 나들이었다.

준공식에서 대통령은 일주도로 현장을 돌아보고 매우 만족스러운 모습으로 귀경했다.

제주의 오랜 숙원이자 현안懸案 사업이던 일주도로 포장공사가 당초 예정보다 2개월 앞당겨 완공됐다.

이는 권도백의 적극적인 대중앙對中央 절충에 의해 착공, 연인원延人員 32만명이 투입되고 중장비만도 2800여 대가 동원됐다.

197038일 중앙에서는 문화재위원을 파견하니 협재동굴을 답사하고, 만장굴과 수산굴도 답사해 만장굴만은 곧 문화재로 지정될 것이라 했다.

동년 316일 정부는 한라산을 국립공원으로 지정했는데, 전년 권용식 지사는 한라산 국립공원안을 국립국토건설 종합계획심의회에 상정, 확정지었다.

그러나 권도백은 재임 중에 연탄값 파동‘A급 태풍 <빌라>의 피해그리고 어승생댐의 누수사고고구마값 인상요구등 여러 난제難題 해결에 시달리기도 했다.

또한 재임 중 서귀포에서 부산으로 항해 중이던 남영호南榮號 난파難破 사고로 연말 애도와 추모의 물결이 끊이지 않았다.

 

제주신문(濟州新聞) 1970년 12월 15일자 남영호 침몰 관련 기사.
제주신문(濟州新聞) 1970년 12월 15일자 남영호 침몰 관련 기사.

남영호는 19701215일 새벽 125분께 상일도上日島(거문도 동쪽) 동쪽 20마일 해상에서 전복, 침몰된 뒤 부근을 지나던 일본 해상보안청 소속 순시선에 의해 승객 8명만이 가까스로 구조됐다.

남영호의 승객정원은 302명이고 화물적량은 250t이다.

이 날 승선자는 338명으로 비공식 확인되고 타도 출신이 111명인데 이는 감귤철이라서 육지 상인이 상당히 탑승했다.

19716월 권도백의 후임으로 이승택李昇澤이 임명됐다.

권도백은 전국산림조합연합회장에 이어 1973년 농업진흥공사 사장으로 기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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