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6)제주읍에서 제주시로 승격…한라산 완전 개방 선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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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성운, 제7대 제주도지사 재임…도립제주초급대학 4년제로 승격…국립송당목장 설치 등 많은 업적
길현범, 정의현감·남포현감 등 지내
김갑복, 부인회제주지부장 등 역임
김갑우, 탐라의 공마 명나라에 바쳐
김갑환, 오사카 공산당 항일활동 
김건남, ‘진휼당상 가선대부’ 수여
길성운 제주도지사(사진 왼쪽)가 동료 2명과 함께 한라산을 등반한 모습. 그가 부임할 당시 4·3사건으로 인적이 끊어진 한라산 ‘완전개방’이 선언돼 누구든지 등산할 수 있게 됐다. 길성운은 재임 당시 제주대학 4년제 승격, 제주시 승격, 서귀읍·대정읍·한림읍 승격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출처=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길성운 제주도지사(사진 왼쪽)가 동료 2명과 함께 한라산을 등반한 모습. 그가 부임할 당시 4·3사건으로 인적이 끊어진 한라산 ‘완전개방’이 선언돼 누구든지 등산할 수 있게 됐다. 길성운은 재임 당시 제주대학 4년제 승격, 제주시 승격, 서귀읍·대정읍·한림읍 승격 등 많은 업적을 남겼다. 출처=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길성운吉聖運1912(일제강점기)~?, 행정가. 7대 제주도지사.

가족과 함께 미국美國에 이민, 최승만 지사의 강력한 천거에 의해 195311월에 제7대 제주도지사로 임명되어 19595월까지 5년 반을 재임했다. 그는 평안북도 선천宣川군 심천深川면 태생으로 와세다<早稻田>대학 법과 교외수강생을 마쳐 만주국으로 건너가 안동安東의 신흥新興상업학교 교사로 재임 중 19457월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일경日警에 체포 수감됐다가 1945년 해방이 되자 과도정부의 문교부 인사과장으로 관계에 투신했다.

1948년 임시 외자청外資廳의 총무과장·감사과장 등을 역임하고 1951년 제주도 총무국장으로 부임해 최승만崔承萬 도지사를 보필했다.

길도백吉道伯은 시정施政 5대 방침을 애국애족·공비완멸·교육진흥·농촌진흥·산업개발 등으로 정했다.

재임 중 도립제주초급대학을 4년제 대학으로 승격시키고 제주읍을 시로 승격시켰다.

서귀면·대정면·한림면을 읍으로 승격, 또 한경면이 독립 분리되었으며 국립송당松堂목장 설치 등 업적을 남겼다.

1954313일 시내 동문시장에 대형화재가 발생, 불은 겉잡을 수 없이 가옥 77채를 전소, 16채가 반소, 부상자가 속출됐다. 이 화재로 486세대에 2604명의 이재민이 발생, 구호본부를 설치했고 KCAC(한국민사원조처)의 해이든 총사령관이 직접 내려와 화재현장을 돌아보는 한편 길도백으로부터 복구 계획을 청취하고 복구지원을 약속 받았다.

1954한라산 완전 개방이 선언, 19484·3으로 인적이 끊어진 한라산을 누구든지 등산할 수 있다는 당시 아무도 예측 못했던 선언이 전격 발표됐다.

이어 한라산 횡단도로 조사반에 의해 횡단도로 공사를 위한 현지시찰에 나서게 되는 등 일이 일파만파로 증폭됐다.

1955년에는 7월 제주읍의 시승격市昇格이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되고 85일에 시제市制실시가 정식 공포, 91일 제주시제가 실시, 22명의 읍의회 의원들은 시의회 의원으로 명칭이 바뀌었다.

길지사는 19551121일 국회의원 일행 내도시에 환영사를 통해 제주도의 5대 자원론을 피력하되 수산자원, 축산자원, 특용작물, 공원자원, 학술자원이라고 말하며 이 자원 개발에 온 행정력을 쏟겠다고 다짐했다.

길도백은 19593월에 40여 일 동안 필리핀을 시찰해 귀국, 정부는 동년 513일 길성운 도지사를 평남도지사로 발령했다.

이후에는 인하대학仁荷大學 상무이사 겸 임시학장, 인천도시관광사장, 흥한재단 전무이사 등을 거쳐 한일韓逸개발 주식회사의 고문으로 제주에서 근무하다가 미국으로 건너갔다.

길현범吉顯範문신. 고종 때의 정의현감. 1835(순조35) 6월 김계중金継重의 후임으로 도임하고 1837년 장령으로 제수되자 떠났다.

길현범의 본관은 경상도 구미 선산이며 강원도 춘천군 사내면史內面에서 길인환吉仁煥의 아들로 태어났다.

1871(고종8) 문과 정시에서 병과로 급제, 뒤에 남포현감藍浦縣監으로 전출되어 재임 중 그곳에서 죽어 병조참의로 추증됐다.

김갑복金甲福()1933~?. 평안북도 출신. 제주피난고등학교 졸업(교장 김상흡, 1953). 제주라이온스클럽 회장 장용하張龍河(평북)의 부인. 한국부인회제주도지부장, 여성단체제주도협의회 회장.

김갑우金甲雨?~1374(공민왕23), 고려 공민왕 때의 무신. 탐라의 말을 명나라에 바치고 돌아왔다.

1369(공민왕18) 천우위대장군千牛衛大將軍으로 천추사가 되어 명나라에 다녀왔다.

1372년에는 대호군으로 탐라의 공마 50필을 명나라에 바쳤다. 그가 제주까지 와서 말을 구해 갔는지에 대한 기록은 없어 확인할 수는 없으나 제주에서 바친 공마를 헌납한 것은 사실이다.

그런데 1374년 정비鄭庇 등이 남경에서 돌아올 때 가지고 온 중서성의 자문咨文, 전에 보낸 공마가 모두 타지 못할 것들이라고 하여 트집을 잡은 내용이 있었는 데, 그 책임으로 함께 다녀온 역관 오극충吳克忠과 함께 공민왕에 의해 주살됐다.

 

1960년대 조천포구 모습. 오사카 공산당 항일 활동을 벌인 김갑환은 조천읍 조천리에서 태어났다.
1960년대 조천포구 모습. 오사카 공산당 항일 활동을 벌인 김갑환은 조천읍 조천리에서 태어났다.

김갑환金甲煥1914(일제강점기)~?, 일본 오사카에서 공산당의 항일 활동. 본관은 김해, 송산松山 김명식金明植의 장남, 조천리<조천포> 이동파梨洞派 김씨 조천리에서 태어났다.

김갑환은 조천공립보통학교를 졸업하고 19283월 일본으로 건너가 공장의 직공으로 일하면서 항일 운동을 펼쳤다.

일본식 성명은 수기모리<杉森> 혹은 다카다<高田>로 변신, 항일 활동에 앞장섰다.

19319월 현호경玄好景(성산포)의 소개로 전협全協 화학노조 효고<兵庫>현 지부에 가입했다.

19324월에 오사카로 가서 김중원金重遠, 손표기孫漂基와 연락하면서 전협 남지구 보조 조직원으로 활동했다.

동년 12월에 북지구 조직원이 되고, 19331월 가와가미<川上謙一郞>의 소개로 일본공산당에 입당했다.

19334월 화학 노조 간사이<關西>지부를 확립, 책임자가 되었다. 전협全協 화학노조에서 활동하던 중 동년 5월에 검거, 8월에 기소됐다.

1934915일 오사카지방재판소에서 소위 치안유지법 위반으로 징역 2년이 확정되어 옥고를 치렀다.

김건남金建南1608(선조41)~1695(숙종21), 자선가慈善家. 본관은 김해, 조천읍 조천리에서 김달손金達遜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후손이 조천·애월 일대에 많이 살아 복파김씨라고도 한다.

대농으로 농산물을 많이 거두어들이며 또 부지런하기로 유명하여 평소 남들에게 이르기를 부자가 되고 인심을 잃으면 이는 곧 수전노이다라고 했다.

1682(숙종8)부터 1687(숙종13) 사이에 제주에는 흉년이 자주 와서 도내에 큰 기근이 들자 김건남은 비축해 두었던 조·보리 수백 곡을 희사, 이웃 마을의 기민들에게까지 진휼하였다.

당시의 제주목사가 조정에 사실을 보고하니 가상하다고 여겨 진휼당상賑恤堂上 가선대부를 수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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