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족이 서로 죽이는 아비규환
동굴에 숨은 젖먹이도 학살돼
평화공원 60만평 규모로 조성
전쟁 비극 생생한 사진 등 전시
종전일 공휴일로 ‘추모 확산’
제주와 일본 오키나와, 중국 난징은 민간인 집단 학살이라는 비극의 기억으로 연결돼 있다.
본지는 국가폭력에 대한 증오를 승화시켜 진실 규명과 화해, 그리고 평화의 소중함을 일깨우고 있는 해외 사례를 2차례에 걸쳐 살펴본다.
오키나와전쟁은 1945년 4월 1일 오키나와에 상륙한 미군과 방어를 맡은 일본군이 81일 동안 벌인 지상전이다.
일본군(7만7166명)과 미군(1만4009명)·영국군(82명) 이외에 섬 전체 인구의 4분의 1인 약 12만명의 민간인들이 희생됐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주민들을 총알받이로 내몰았고, 집단 자결을 강요했다.
일본군은 미군에게 잡히면 ‘남자는 사지를 찢어서 죽이고 여자는 강간한 후 살해당한다’라며 비참한 꼴을 당하느니 천황을 위해 영광스럽게 자결하라며 주민들에게 수류탄을 나눠줬다.
그런데 불발탄이 많아서 농약과 극약을 먹고 주민들은 죽어나갔다.
더 비극적인 상황은 이런 물품이 부족해 살아남은 가족들은 돌과 죽창, 몽둥이, 농기구를 써서 부모가 자녀를 돌로 내리치고, 남편이 아내를 때려죽이는 아비규환이 벌어졌다.
가족과 친구끼리 서로의 생명을 빼앗도록 내몬 것은 집단 자결이 아니라 ’강제 집단 학살’이나 다름없었다.
청년들은 “이대로 죽느니 미군을 한 놈이라도 죽이고 죽자!”라며 지옥 같은 현장을 빠져나왔는데 밖에서 처음 만난 사람은 미군이 아니라 일본군이었다. 자결을 강요했던 일본군은 멀쩡히 살아있어서 배신감에 치를 떨어야 했다.
강요된 죽음을 피하기 위해 주민들은 섬 남부에 흩어져 있는 천연동굴을 피난처로 삼았다.
후퇴하던 일본군은 동굴까지 숨어들어온 후 미군에게 들킬 것을 우려해 세 살 이하 어린이는 입을 틀어막아 죽일 것을 명령했다.
일본군이 직접 젖먹이의 목을 조르거나 주사를 놔 죽이기도 했다.
어린 소년이나 70대 노인까지 주민의용대로 징집된 가운데 일본군은 주민들에게 폭탄을 안고 미군의 탱크로 뛰어들게 하거나 기관총 총알받이로 내모는 반인륜적 범죄를 저질렀다.
민간인을 끌어들여 최대한 전쟁을 지연시키는 과정에서 광기와 공포가 온 섬을 휩쓸었다.
81일간 지속됐던 전쟁은 1945년 6월 23일 제32군 사령관 우시지마 미치루가 자결하고, 일본군이 패전하면서 종결됐다.
푸르고 광활한 태평양이 내려다보이는 오키나와 남부 이토만시 마부니 언덕은 미군과 일본군의 최후의 격전지였다.
이곳에 건립된 평화기념공원은 200만㎡(60만평)에 이른다.
이곳 자료관에는 이런 글이 적혀 있었다. ‘전쟁이 인간을 이토록 잔인하게 만든다는 생생한 체험 앞에서, 어느 누구도 전쟁을 긍정하고 미화할 수 없다. 우리는 모든 전쟁을 원망하며 오키나와를 반드시 평화로운 섬으로 만들어야 한다. 너무나도 큰 대가를 치르고 이런 확고한 신념을 얻었다.’
전시실에는 전쟁의 비극을 생생히 보여주는 사진과 유물들이 전시돼 있었다. 폭격으로 불타버린 가재도구와 희생자의 옷, 동굴에 숨어들어온 일본군이 젖먹이를 죽이도록 강요하는 모습도 재현해 놓았다.
공원 중앙광장에는 ‘평화의 초석(平和の礎)’이 있다. 이를 중심으로 약 20만명의 희생자 이름을 새겨 놓은 거대한 대리석이 부채꼴로 펼쳐져 있었다.
민간인은 물론 일본군과 미군·영국군의 이름까지 새겨놓았다. 오키나와전쟁에서 목숨을 잃은 사람들은 가해자와 피해자, 국적 구분 없이 이들의 이름을 돌에 새긴 것이다.
강제 징용으로 끌려온 한국인 약 1만명도 이 전쟁에서 희생된 것으로 추산되지만 현재 600여 명만 이름이 새겨져 있었다.
평화기념공원을 안내한 해설사는 “과거에는 총기와 철모, 포탄 등 군대와 전시상황에 대한 유물을 주로 전시했는데 신관을 건립한 이후 주민의 시점에서 바라본 전쟁의 참혹함과 평화의 소중함을 일깨우는 증언과 자료를 주제별로 전시했다”고 말했다.
한편 오키나와는 종전일인 6월 23일마다 평화위령제를 열고 있다. 오키나와현은 ‘6·23위령의 날’을 지방공휴일로 지정해 추모 분위기를 확산시키고 ‘평화의 섬’을 각인시키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