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8) ‘돌(石)’을 벗 삼은 시인 묵객…‘이승만 성토서’로 유명
(68) ‘돌(石)’을 벗 삼은 시인 묵객…‘이승만 성토서’로 유명
  • 고동수 기자
  • 승인 2018.12.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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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경하, 음모 방관죄로 제주 유배
김경회, 김만일 후손…문과 급제
김경흡, 고종 때 세습 산마감목관
김경희, 조천독립만세운동 주도
김경종, 문인단체 영주음사 사장
오현단 일대가 새롭게 복원되기 이전 모습. 김경종이 사장으로 지낸 문인단체인 영주음사는 오현단 내부에서 활동했다. 94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영주음사는 매월 한시발표회를 여는 등 회원 간의 한시 실력 향상을 꾀하며 한시문학을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출처=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오현단 일대가 새롭게 복원되기 이전 모습. 김경종이 사장으로 지낸 문인단체인 영주음사는 오현단 내부에서 활동했다. 94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영주음사는 매월 한시발표회를 여는 등 회원 간의 한시 실력 향상을 꾀하며 한시문학을 발전시키기 위해 노력하고 있다. 출처=제주특별자치도 刊 ‘사진으로 보는 제주역사’

김경하金經夏1854(철종 5)~?, 한성부관찰사. 장례원 전사典祀(3), 유배인. 본관은 제안齊安, 황해도 멱미覓美면 유랑柳浪동 출생 서울 정동에서 어릴 때부터 자랐고 1879(고종16)년에 영어학당을 졸업했다.

1886년 제중원 주사로 공직을 출발, 교섭아문 주사·공조참의·부승지·내부참사관·한성부관찰사 등을 역임했다.

1896(건양1) 명성황후 시해 음모 방관죄로 제주도로 종신 유배됐다.

1901년 제주에 신축민란이 일어나자 유배인과 연루되어 유배인들에게 이배령移配令이 내려졌고, 1901(광무5) 67일 전남 녹도鹿島로 떠났다.

이후 1908년 장례원 전사典祀(3)에 기용되었다.

김경회金慶會1746(영조22)~1799(정조23), 문신. 본관은 경주이며 공신 김만일의 후예.

김석겸金錫謙의 아들로 표선면 토산리에서 태어났다.

1774(영조 50) 제주순무어사 홍상성洪相聖이 내도, 시제試題사호성주부賜號星主賦로 글을 짓게 하고 그 답안지를 지참해 상경, 17751월 홍문관 제학 이담李潭이 제주도과道科에서 시권의 성적을 차례로 뽑을 때 문과에 합격하고 전시에 응하도록 했다.

그는 전시문과에 나아가 제주 사람 장한철張漢喆(애월), 강봉서姜鳳瑞(어도)와 함께 세 사람이 급제했다.

관직은 승정원 주서·성균학유·장령 등을 역임했다. ‘국조방목에는 본관이 김해로 적혀 있다.

필자의 변 : 내가 살피건대 헌마공신 김만일金萬鎰도 김해로 기록된 문건이 있어 이에 대한 연구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세습 산마감목관 김경흡의 교지.
세습 산마감목관 김경흡의 교지.

김경흡金暻洽1842(헌종8)~1922(일제강점기), 고종 때의 세습 산마감목관. 초명은 김시욱金始旭, 자 공명公明, 호는 난곡蘭谷. 본관 경주. 남원읍 태흥리<->에서 김성겸金聖兼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김경흡은 1892(고종29) 세습직인 산마감목관山馬監牧官으로 뽑혔다.

1895(고종32) 봄 조정의 직제 개편 및 지방관 제도의 혁신으로 산마감목관·만호·심약·검률·왜학·역학 등이 폐지되어 감목관 직제가 없어졌다.

그 후 그는 훈학에 뜻을 두고 정의향교의 훈장을 다년간 역임했다.

한편 세습직으로 이어져 온 공마제도가 개혁되고 1896(건양1) 직제 개편에 의해 237년 간 세습해온 산마감목관직이 폐지됐다.

김경희金慶熙1894(고종31)~1952, 기미년 조천만세운동 당시의 항일 활동가.

본관은 김해, 김병환金秉瓛의 아들로 산북 조천리에서 태어났다.

1919년 조천독립만세운동을 주도한 김장환은 독립선언서를 숨기고 제주에 들어 왔고, 김시범·김시은과 함께 317일 경 조천리 미모치味毛峙(미밋동산)에서 거사 발의를 하고 동지 규합에 나섰다.

규합된 인원은 14명의 동지인 김경희, 김시범, 김시은, 고재륜, 김형배, 김연배, 황진식, 김용찬, 백응선, 김장환, 박두규, 이문천, 김희수, 김필원 등이다.

그는 1919426일 광주지방법원 제주지청에서 징역 6월을 선고받아 항소, 동년 529일 대구복심법원에서 기각됐다.

정부에서는 고인의 공훈을 기리어 19933·1절 기념일에 독립 유공 대통령표창을 추서했다.

김경종金景鍾1888(고종25)~1962, 문사, 호는 석우石友, 유림의 거목, 한약방 김약국운영, 본관은 김해, 제주시 노형동<월랑>에서 태어났다.

한말에 간재艮齋 전우田愚(1841~1922)에게 수학했다. 김경종은 일찍이 간재 전우 문하에서 한문을 익히기 위해 전북 계화도界火島로 건너가 다년간 글공부를 했다.

간재의 문하생으로 제주의 선비는 고경수高景洙(오라), 고병오高炳五(모슬포), 김태교金泰交, 김옥림金玉林 등이 있었다.

그는 영주음사瀛洲吟社의 사장을 역임했다.

영주음사는 1924년 봄 제주도내 문인 123명이 모여 설립한 문인단체였다.

영주음사瀛洲吟社 사장으로서 문인들을 규합하면서 전통 문화를 이었다. 또한 제주향교의 훈장으로 한문을 강술했다.

그는 일제강점기에 타협하지도 않고 복종하지도 아니하면서 절조를 지켰다.

김경종은 32녀를 두었다. 그러나 4·3사건의 와중에 큰 아들이 희생되고 막내아들까지 병사하는 등 고통을 겪었다.

그의 글의 이승만에게이승만성토서李承晩聲討書에서 4·3사건 당시 제주도민들이 군경에 의해 수없이 죽임을 당하고 있는 참상을 고발하고 잔혹한 진압의 책임을 당시 대통령에게 물으면서 중국의 항우項羽에 비교하며 통렬하게 꾸짖었다.

그의 저서의 글 石友說에서 돌에 대해 오직 돌만은 그렇지 않다. 사람의 시비와 선악 일체를 입 다물고는 누설하지 않는다. 자기의 고요한 침묵과 목소리의 묵직함으로 평생을 스스로 지키면서 변하지 않는다. 그 기질은 완고하면서도 진실이 있다. 그 생김새는 어리석은 듯하면서도 확고하다. 굴려도 움직이지 않는다. 움직이더라도 뽑히지 않는다. 씻어도 희어지지도 않는다. 갈아도 닳아지지 않는다.”

이와 같은 연유로 그는 돌을 벗으로 삼았다.

그는 제주-성안칠성통七星通에서 한약방韓藥房 김약국을 경영, 늘 서책을 가까이 하는 시인묵객으로서의 삶을 살았다.

60대 중반에 이르러 저서 백수여음白首餘音석우시집石友詩集을 남겼다.

필자의 변 :나는 북제주문화원장으로서 김경종의 한문저서 백수여음을 백규상白圭尙에게 번역하도록 해서 출간했다.

김경종에게는 창진(한약방 경영효진(북제주군 내무과장한진(전기회사) 등의 자녀들이 있다. 맏이는 4·3사건에 군경에게 죽고, 막내는 병사하는 고통을 겪었다. 그래서 당시의 대통령 이승만을 중국의 항우에 비교하며 통렬히 꾸짖는 글도 그의 저서에 보인다. 1950년 이승만 성토문聲討文 첫머리에 昔項籍殺秦降卒四十萬 世皆謂無道 今李承晩殺國內罪囚數十萬其暴虐無道 與項籍果如何也(옛날 중국의 항우는 진나라의 항복한 병사 40만을 살해했다. 만세에 모두 무도하다고 일컫는다. 지금 이승만은 나라 안 죄수 40만을 죽였으니 그 포학무도함이 항적과 더불어 과연 어떠한가!)”라고 했다.

제주시 노형老衡은 당시 오지여서 감언이설에 적화되기도 하고 무고하게 살육을 당하는 경우가 있었다.

이런 오지가 지금 많은 인물이 배출되었을 뿐만 아니라 현재 가장 번창한 도시 중심부가 되었으니 금석지감今昔之感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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