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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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승희, 춘강장애인근로센터 사무국장·수필가

골목마다 차가 가득하다. 주차난은 언제쯤 해결될 것인지! 그날도 우리는 속도를 늦추고 양쪽으로 주차된 골목길에서 요리조리 곡예 운전을 하고 있었다.

‘쿵’하는 소리는 나지 않았다. 그저 ‘찌익’하는 작은 잡음에 ‘아이고!’하며 차에서 내려야 했다. 마침 긁힌 차 주인이 보고 있었는지 바로 왔고, 시비가 붙어 고성이 오갔다.

이제는 흔한 에피소드다. 이 일의 핵심은 주차난이 아니었다. 다툼이 있고 난 뒤 며칠이 지나 당사자에게 물어봤다. 어차피 보험 처리할 것 아니었나? 왜 그리 심하게 싸웠나? 지인의 대답은 ‘아’ 다르고 ‘어’ 다른데, 자신을 몰아붙이는 말에 기분이 상하였단다. 차량 보상과 감정 상함은 별개라며 아직도 분이 덜 삭힌 듯 식식거렸다.

언쟁 중 험한 말의 시작은 상대방이었지만 지인의 폭언도 만만치 않았다. 하지만 차마 그 말을 할 수는 없었다. 나라고 별반 다르지 않음을 인정하기에. 다만, 칼로 찌르는 말들이 난무하는 요즘이 서글펐다.

2019년을 보는 사자성어로 ‘임중도원(任重道遠)’, ‘각자도생(各自圖生)’이 회자하고 있다. 공감하면서도 허탈함과 씁쓸함을 떨칠 수 없다. 국내외 경제 상황이 어렵다는 것은 경제전문가의 분석이 아니더라도 우리에 주머니가 가볍고, 장바구니가 가벼워졌기에 이미 체감하고 있다. 그러기에 더욱 함께하여야 한다는 뜻으로 호애공생(互愛共生)의 해라 이야기할 수는 없었을까?

말이 씨가 된다고 했는데 국민들에게 희망을 주는 사자성어는 도무지 없는 것인가. 우리 속담에 혀 밑에 도끼가 있어 사람이 자신을 해치는데 사용한다는 속담이 있다. 말은 자신과 함께 이웃을 해치고, 심지어 일면식도 없는 타인까지도 해치게 됨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SNS가 일상을 덮는 요즘의 실태는 더욱 심각하다. 쏟아지는 말에 우리는 생명과 삶이 위협받는 피해자가 되기도 하고, 무심코 혹은 당시의 감정에 휩싸여 쓴 댓글을 통하여 가해자가 되기도 한다.

성경에 보면 제자들이 예수께 나아와 천국에서는 누가 큽니까 하고 묻자 어린아이들과 같이 되지 아니하면 결단코 천국에 들어가지 못하리라. 누구든지 이 어린아이와 같이 자기를 낮추는 사람이 천국에서 큰 자다라고 대답하신다.

초신자였던 내가 이 대목을 이해하게 된 것은 현 직장에서 지적장애인들과 함께하면서이다. ‘어린아이와 같이 언제나 낮은 자로 살아가며 타인을 밟고 내가 위에 서겠다는 생각을 품지 않는 이들은 천국에서 큰 자이겠구나!’라는 생각이 들자 성경의 말씀이 이해가 되었다.

중증장애인이라 구분되는 지적장애인들은 대부분 말을 직설적으로 한다. 지적 능력이 낮기에, 격식에 맞고 올바르게 말하는 방법을 비장애인보다 모르는 것이 당연할 수도 있다. 하지만 내가 함께한 지적장애인들은 상대방에게 악한 감정을 갖고 공격하기 위하여 말을 하지는 않았다.

우리는 스스로 구분하여 지적 능력에 장애가 없는 비장애인이라 여긴다. 우리의 말도 그런지 오늘 하루 되돌아보자. 우리가 건네는 말이 우리가 쓰는 댓글이 죽이는 말을 하고 있는가 아니면 살리는 말을 하고 있는가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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