깨어나는 것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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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기해년 들어 이런 사진이 실린 일간지가 나라 안에 있을까. 아마 ‘제주新보’가 유일할 테다. 고봉수 사진기자의 <맹금류 매의 ‘짝짓기’>. “번식기에 들어간 맹금류인 매 한 쌍이 지난 16일 서귀포시 남원읍 한 해안가 암벽에서 짝짓기를 하고 있다”는 해설을 달고 있는 1면 우측 상단의 사진(제주新보, 2019.2.18.월요일)은 압권이었다. 봄을 앞둔 경향의 신문들을 모아 놓고 품평회라도 했으면 어떨까 싶게 독자들 시선을 사로잡았다.

짙은 어둠을 등지고 희부옇게 이끼 덮인 암벽이다. 거기 겨우내 마른 넝쿨이 걸려 있고 한쪽 바위 위로 날개 치며 내려앉는 날짐승의 그 역동적 동세. 새벽 다섯 시 신문을 받아들고 졸던 눈이 번쩍 띄었다. ‘아, 봄이 왔구나.’ 눈이 그만 사진에 꽂혀 버렸다.

숙련된 기술만으로는 안되는 것 아닌가. 고봉수 기자는 저 한 장의 사진을 찍기 위해 얼마나 많은 시간을 기다림에 갇혔을 것인가. 긴장과 조바심과 인내 뒤, 시간과 대상물과의 절묘한 조우. 셔터를 눌렀던 시각이 언제였나는 전혀 문제되지 않을 것이다. 숨죽였던 그 전리품, 획득한 자체로 가치인 것을. 기막힌 조합이고 놀라운 성취가 아닌가. 순간이 포착해 낸 저 생동하는 한 장의 사진.

하루 지나 실린 또 다른 사진에 그만 매몰됐다. 우수(雨水) 뒷날, 신문의 같은 자리에 개구리란 놈이 계곡에서 활활 헤엄을 치고 있었다. ‘일찍 깨어났구나’(제주新보, 2019.2.20. 수요일). 남원읍 한 계곡에서 갓 겨울잠을 깬 개구리가 기세 좋게 물속을 헤치는데, 부릅뜬 두 눈에 졸음기라곤 없다. 이미 봄이 어리었다.

대동강이 풀리고 동면하던 개구리가 놀라 잠에서 깨어난다는 경칩을 앞둔 절기가 우수다. 참다 참다 끝내 보름을 못 참아 개구리가 땅속을 나와 흐린 물속에서 헤엄을 치고 있다. 그렇다. 사진은 사실성과 현장감으로 승부하는 장르인 게 맞다.

기자 한 분의 노고가 전해준 봄의 메시지는 강했다. 예약한 적이 없었다. 따뜻한 곳이라 서귀포를 찾아갔을 것 아닌가. 이 두 장의 사진을 찍기 위해 한라산을 넘고 직감 따라 길을 갔고, 기어이 매서운 매와 폴짝대는 개구리를 해후했을 테다. 대상에 몰두할 때 딛게 되는 가파른 굽잇길을 그는 갔다. 걸음에 경의를 표한다.

덕분에 눈앞에 와 있는 봄과 마주한다. 고 기자의 앵글이 복수초를 담은 건 1월 중순께였나. 아직 바람 맵고 한기 있지만 비켜 있던 앞산이 부스스 깨어 다가앉는다. 정원의 작은 숲으로 여린 햇살이 내리고, 나무들이 물을 퍼 올리느라 수액작업이 한창이다.

마당 모퉁이 자목련 꽃망울이 봉곳해 터뜨릴 날을 기다린다. 머잖아 아린이 겨우내 싸고 있던 겨울눈을 쫘악 열어 놓을 것이다. 어서 기지개 켜고 일어나라 채근한다. 모과나무도 감나무도 무화과도 다들 깨어났다. 눈여겨보니 겨자씨만한 느릅나무 잎눈도 요 며칠 새 잠에서 깨어나 고물거리고 있다. 봄으로 깨어난 조그만 생명들의 숨결이 느껴진다. 언제 봐도 작은 것은 대견하다.

마당 복판에 서서 귀를 기울인다. 부스럭거리며 깨어나는 것들로 사위가 부산스럽다. 생명은 깨어나야 한다. 사진 속의 매는 지금쯤 먹이를 찾아 공중을 선회할 것이고, 헤엄치던 개구리는 풀밭에 나와 폴짝폴짝 뛰어 다니리라. 온갖 것들이 겨울을 털고 나와 활개 치는 생명의 계절, 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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