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화
장화
  • 제주신보
  • 승인 2019.0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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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옥선 수필가

대한大寒이 지났으니, 봄이 올 날도 멀지 않았다. 아침부터 내리기 시작한 비는 그칠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 우산을 쓰고 밖으로 나갔다. 마당의 가장자리를 지키고 있는 매화나무의 꽃눈들은 어제보다 더 통통해졌고, 분홍빛까지 살짝 돌고 있었다. 작약은 붉은 싹을 땅위로 들어 올리고 있는 중이고, 복수초가 있던 자리에는 흙이 봉긋하게 솟아있다. 모두 겨울잠을 자고 있는 줄 알았는데 보이지 않는 작은 움직임들이 경이롭다.

우산을 접고 방으로 들어오다 보니 현관 옆에서 비를 피하지 못하고 서 있는 남편의 장화가 눈에 들어온다. 딱히 둘 곳이 마땅치 않아서 밖에 세워두었더니 겨울비를 맞고 있는 중이다. 장화의 물기를 털어내고 신어본다. 발바닥에 찬 기운을 느끼는 순간 떠오르는 얼굴이 있다.

 

군 복무를 하던 중 아버지는 사고를 당했다. 몇 번의 대수술 끝에 겨우 몸을 추슬러 고향으로 내려왔지만 시골살이는 녹록치 않았다. 아버지는 생계를 위해 어쩔수 없이 가축 돌보는 일을 선택하셨다. 축사에 쌓인 오물들을 청소하느라 하루 종일 무릎까지 올라오는 긴 장화를 신고 계셨다. 저녁 무렵이 되어서야 마루 끝에 앉아 힘겹게 장화를 벗고는 긴 한숨을 내쉬곤 하셨다. 고약한 냄새가 배어 있던 장화는 우리가 벗어놓은 신발들 사이에 끼이지도 못하고 항상 구석자리에 비스듬히 기대어져 있었다.

아버지는 간질환까지 앓고 계셨다. 같은 병으로 세상을 떠난 형님이 계셨던 터라 가족들에게 당신의 상태에 대해서 함구하셨다.

아버지의 장화가 문 밖에 기대어 있는 날이 점점 많아졌다. 그런날에는 왠지 불안한 마음이 들어서 괜히 안방을 들락거렸다. 코고는 소리조차 들리지 않을때면 숨쉬는 기척이라도 확인해야 안심이 되곤 했다. 잠에서 깬 아버지가 마루 끝에 앉아서 장화를 신고는 휘청거리며 밖으로 나가셨다.

유난히도 추웠던 음력 섣달, 아버지는 더 이상 장화를 신을 수 없게 되셨다. 예순을 겨우 넘긴 아버지의 부음을 듣고 문상오신 분들을 위해 마당에다 연탄을 잔뜩 쌓아놓고 불을 피웠다. 연탄은 장작처럼 불꽃이 크게 일지는 않았지만 바람이 불어도 꺼지지 않았다. 그날 아버지의 장화는 주인을 잃은 줄도 모르고 덩그마니 마루 아래를 지키고 있었다.

 

몇 년 전, 나는 간독성으로 고생한 적이 있었다. 독성을 일으키는 약탓에 간수치가 높아졌고, 간이 제 기능을 못하자 황달까지 앓았다. 음식물을 소화시키는 것조차 힘들었다. 침대에 누우면 아득히 깊은 곳으로 몸이 끌려 들어가 다시 일어날 수 없을 것만 같았다. 이대로 잠이 들면 깨어나지 못할 것 같았다. 아버지도 그랬을까. 겨우 몸을 추슬러 장화를 신었을 아버지의 모습이 나를 일으켜 세웠다. 아버지의 장화를 한번도 닦아드린 적이 없던 나. 그 장화를 신고 계신 아버지를 너무 늦게 발견한 것은 아닐까.

 

자두나무 옆에는 노루귀가, 앵두나무 아래는 제비꽃이, 동백나무 앞쪽에서는 할미꽃이 딱딱한 흙을 부드럽게 만들고 있는 중이다. 제법 연한 초록빛을 띠고 올라오고 있는 녀석은 수선화일 게다.

장화를 깨끗하게 닦았다. 햇볕이 나면 잘 말려서 신발장으로 들여 놓았다가 날이 좀 풀리면 장화를 신고 나가야겠다. 겨울을 견뎌낸 꽃밭에 풀들도 뽑아주고, 부드러워진 흙을 파고 씨앗도 뿌려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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