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0)홍길동전 등 출연…각본·연출까지 ‘만능 엔터테이너’
(80)홍길동전 등 출연…각본·연출까지 ‘만능 엔터테이너’
  • 고동수 기자
  • 승인 2019.04.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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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대현, 고향 노래한 시인
김대형, 개량서당 신축…신식 공부 장려
김대흥, 제주향교 도훈장
김대희, 부인 강석제와 연극 배우 활동
김대황, 파도에 휩쓸려 31일간 표류…베트남 도움으로 귀환

김대현金大炫1923(일제강점기)~?, 시인. 교사, 구좌읍에서 출생, 일본 도쿄 문화학원 전문부 졸업.

1954년에 시집 청사를 발간한 후 1959사상계지에 시 와우蝸牛를 발표하면서 정식으로 데뷔했다.

주로 충청남도에서 교편敎鞭생활을 했고 시집으로는 청사’, ‘옥피리’, ‘보리수’, ‘청지靑紙 한 장’, ‘구름 꽃 묵음黙音과 새’, ‘푸른 숲 푸른 달빛등이 있다.

김대현 시조時調는 고향 의식으로 점철되어 있다.

그것은 그가 고향을 떠나 생활하고 있는 데에서 기인起因하는 결과이다.

그 고향 의식은 주로 기억의 형식을 통해 드러나며 오로지 고향에 대한 강한 애정을 기반으로 형성된 것들이다.

꼼꼼히 살펴볼 때에도 김대현 시조는 오로지 고향 의식을 드러내는 데에만 치중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는 그것을 극히 자연스러운 것으로 판단하고 있었던 듯하다. 그는 고향의식을 드러내는 것 이외에 다른 데에는 좀처럼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김대현의 시 고향의 발견’=설사야 꿈은 아니러냐/ 어허/ 故鄕이 아니런 듯/ 여름철엔 알맞은 흰 모잘 쓰고/ 높푸른 漢拏山만이 새롭구나/ 어인 일고/ 물결처럼 끝없이 출렁이며/ 드나드는 城門/ 步哨를 선 婦人희 누덕진 갈옷이여/ 자옥자옥이 눈물이 고여/ 海女들 고달픈 호이 소리도

김대형金大亨1843(헌종)~1927(일제강점기) 향토교육자, 의숙의 숙장塾長. 본관 경주, 한경면 조수리<조숫->에서 태어나 구우면(구우면현 한림읍)의 풍헌風憲을 역임하고 면행정이 현대화되자 면사무소의 초기 영수원領收員으로 공무원을 역임했다.

1924년 조수리에 사립 조수국민학교의 전신인 4년제 개량서당 신성의숙新成義塾 개설을 서둘러 신식 공부를 장려했다.

먼저 친형 김대열金大烈의 미망인 김해김씨를 설득해 아들 창수昌洙의 농토를 희사하게 해 학교 부지를 마련, 개량서당을 신축한 뒤에 인가를 받았다.

김대형은 초대 숙장으로 헌신해 타계하자 19274개리 공동으로 공덕비를 세웠다.

김대흥金大興1887(고종24)~1963, 훈학자. 충청남도 관찰부 주사, 제주향교의 도훈장 역임, 자는 경래慶來, 호는 영헌瀛軒. 본관은 김해이며 제주시 봉개리<봉아름>에서 도은陶隱 김치억金致億3남이다.

1901(광무5) 충청남도 관찰부 주사로 공직을 시작, 1905년 비서승秘書丞을 역임했으나 을사조약에 의해 국권이 기울어지자 관직을 미련 없이 버리고 귀향했다.

1927봉아-오름마을에 동보서당東普書堂을 세우면서 후진 육영과 전래의 호성위도護聖衛道에 힘쓰면서 여가에 시를 지어 그 유고가 전해지고 있다.

그의 서급書笈에 혼홀기婚笏記, 관례홀기冠禮笏記 등이 간직되었다는 기록으로 미루어 예학에도 대단히 관심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또 제주향교의 도훈장을 역임하면서 1934년에 최면암崔勉菴과 백추강白秋江 등 두 선각자에 대한 추모제와 귤원橘園의 오현五賢을 함께 제향에 모셨다.

그의 대표적인 칠언율시 매둔서재 배부해선생梅頓書齋陪浮海先生은 한학하는 이의 입에 자주 오르내렸다.

이로써 그는 매촌梅村서당에서 부해 안병택安秉宅의 문하로서 글을 익혔다는 사실을 확인해 준다.

김대희金大熙일제강점기의 배우, 김희좌金姬座의 일원으로 무대 활동. 배우이며 연출가.

예명은 김진문金振文, 제주시 삼도1<제주-성안>에서 태어났다.

일찍이 연예계演藝界에 투신해 전과자’, ‘홍길동전’(1934) 등 많은 작품의 연극·영화에 출연했다.

또 직접 각본을 쓰고 연출을 맡기도 해 다방면에서 활동했다.

1930년대 초에 극단을 이끌고 제주에 들어와 공연을 했고, 중앙극단劇團에서 내도해 공연한 것으로는 그가 처음이라 보고 있다.

그의 처 강석제姜石齊도 제주 출신으로 남편과 더불어 활동했던 연극 배우였다.

그녀는 1929년 우리나라 신극新劇의 모태가 되었던 토월회土月會의 멤버로 무대 활동을 시작했다.

1930년에는 신흥극단 창립 멤버로, 이듬해에는 경성京城방송극협회 회원으로, 1938년에는 신극단 화랑원花郞苑의 단원으로 활동했다.

모란등기牧丹燈記’(1930), ‘아큐정전Q正傳’, ‘금향애사琴香哀史’(1938) 등 주요 작품에 출연했다.

언니와 함께 토월회에서 활동한 강석제의 아우 강석연姜石燕1920년대 말부터 1930년대에 걸쳐 이름을 날린 윤심덕尹心悳, 김연실金蓮實, 이애리수李愛利秀(이난영) 등과 함께 알려진 가수였다.

강석연이 부른 노래는 방랑자의 노래’(1929), ‘강남제비’(1932), ‘청춘의 노래’, ‘봄편지’(1935) 등 크게 히트쳤다.

그밖에 오동나무’, ‘암로등 많은 노래가 빅터·태평太平·돔보레코드 등에 취입돼 애창됐다.

 

김대황 표해일록이 수록된 제주목사 이익태의 지영록(知瀛錄).
김대황 표해일록이 수록된 제주목사 이익태의 지영록(知瀛錄).

김대황金大璜제주진무濟州鎭撫로서 표류자.

1687(숙종13) 93일 제주진무 김대황 등 24명은 목사가 진상하는 3필의 말을 싣고 출항했는데 추자도 앞에서 동북풍을 만나 31일 동안 표류하다가 안남국安南國(베트남) 회안부淮安府에 도착했다.

그곳 관청의 보호를 받다가 안남 국왕의 허락을 얻어 16887월 쌀 600포를 운임으로 지급할 약속을 해 중국 상선을 얻어 타고 129일 서귀포西歸浦에 상륙했지만 김대황은 지불 능력이 없었으므로 조정에서 은전으로 환산해 지불해 주고 중국 상인들을 육로를 통해 북경으로 보내 주었다.

김대황金大璜의 표해일록漂海日錄은 제주 사람 24명이 항해 중에 베트남에 표류했다가 3명을 이국異國 땅에서 장사를 지내고 어떻게 귀환했는가를 보여준 해양海洋 기록이다.

이어 우리나라로 하여금 무릇 표류한 사람이 있을 때 배가 있으면 바다로 놓아 보내고 배가 없으면 봉성鳳城으로 데려다 주는 것을 법식으로 삼도록 했다.

또한 이들을 싣고 온 중국 선원들에 대한 조치는 이후 중국 표류인의 송환에 선례先例를 남겼음을 조선왕조실록을 통해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