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월을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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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오월은/ 금방 찬물로 세수한/ 스물한 살 청신한 얼굴이다/ (중략)

내 나이를 세어 무엇 하리/ 나는 오월 속에 있다 (피천득의 〈오월〉 부분)

오월의 민낯이 연이은 단비로 생기발랄하다. 한 계절을 완성하려는 봄의 끝 단락, 지금 우리는 오월 속이다. 햇살 따사롭고, 낯 간질이는 순한 바람. 백 가지 꽃 다퉈 피어 지천, 계절의 여왕 오월이 꽃 사태 났다.

해토머리를 기다려 핀 꽃들, 저마다 가슴에 설렘 하나 품었으리. 속 깊이 간절한 숨결로 피어난 신의 선물, 순일한 탐미 취향의 미적 추구, 쾌락의 절정을 휘청대며 채색하고 세공했거나, 오월의 신명에 존재를 과시하는 퍼포먼스…. 표표히 길 떠난 임에게 다가앉은 정념의 속삭임일지도 모른다. 눈물겹게 소복단장에 싸였지 않나, 눈 시리게 희디흰 저 꽃.

오월엔 하늘이 에메랄드의 무게로 내리고, 하늘엔 지향 없이 구름이 흐른다. 오늘의 구름은 어제의 그것이 아니다. 사랑도 오월엔 저 산야처럼 푸르고 숲만큼 아늑하니, 사랑이라면 부렸던 피곤한 일상의 짐도 도로 짊어질 수 있으려니. 묻는다, 하늘을 지르는 저 구름은 미지의 세계를 순력(巡歷)하는 누구의 서사시인가.

‘오월은 푸르구나, 우리들은 자란다.’ 오월을 머금은 목청에 잇따라 키득키득 물오른 웃음소리. 발돋움하며 하늘 우러르는 아이들 눈에 푸른 오월이 고였다.

기지개 켜는 바다. 잇닿는 물결에 둘둘 말려선 굽이굽이 긴 여로에 오르며 찰랑거리는 바다. 해연풍이 어루만지듯 수면 위를 스치며 자잘한 문양을 아로새긴다. 창망해라 바다의 물굽이. 풀었다 당겼다, 그대로 균형이고 절제다. 요동치는 바다는 자발적 리듬이다. 저걸 모방하면 시(詩)다.

푸드덕, 하늘로 새 한 마리 뜬다. 차오르더니 지축이 휘청했다. 무한 허공의 끝, 구만리장공을 날은다. 이내 강하하리. 날았던 지점으로 연착륙하는 오월의 새.

살아있는 것들은 오월에 옷을 갈아입는다. 정원의 나무며 길섶의 풀도 어느새 색의 반란을 일으켰다, 여름으로 번지는 오월의 빛깔이 경이롭다. 연록에서 진초록에로 일탈 뒤, 심화다. 뼛속도 초록이라더니, 더 짙고 깊고 싱그럽다. 더 오묘하고 충일하고 실팍하다.

한여름 땡볕에도 나무그늘이 선선하리. 저기 부들거적 깔고 책장 넘기다 글줄 쓰면 좋겠다. 펄펄 끓는 폭염에서 비켜나면 그대로 여름 속의 내 범주이거늘 나, 꼭 그리하리라. 그러리라 맘먹으니, 미세먼지 나쁨에도 오월엔 신바람이 난다.

작은 숲속에 들앉으면 스멀스멀 스미는 오월의 향기, 그 향기에 절면 들숨 날숨이 푸르다, 숨이 푸르니 꿈도 마음도 푸르다.

버스를 탔는데, 한 젊은 아기 엄마가 오른다. 한 살배기 애를 처네로 싸 업었는데 한 손이 세 살배기를 끌고, 한 손은 까만 비닐봉지를 들었다. 엄마는 힘겨운가. 아이들 눈망울엔 오월이 빠져 허우적거린다. 별처럼 빛나는 눈망울들. 오월의 풀잎 끝 아침이슬이다. 봄비 뒤 영롱한 결로(結露)다. 자리를 양보하려는데 앞에서 한 여학생이 일어난다. 젊은 엄마, 홍조 띤 볼에도 오월이 진득이 눌러앉았다.

세상이, 눈 이르는 처처에 온통 오월이다, 오월을 닮았다. 꿈틀대고 오달지게 활개 치는 것들로 미만한 오월, 다들 오월을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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