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날의 단상
어린 날의 단상
  • 제주신보
  • 승인 2019.0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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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은영 수필가

추억의 얼굴은 늙지 않는다고 했던가. 인생이 깊어질수록 내 유년의 기억들은 아릿한 추억이 되어 세월이 더할수록 애절함으로 다가온다.

이 고장에 불어 닥쳤던 4·3의 상흔과 6·25의 잔상들은 아직도 내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데 세월 따라 그리운 이들은 가고 없다.

 

제주 4·3사건은 공권력에 의해 도민을 무차별하게 학살한 끔찍한 참사다. 그 통한의 역사는 70여년 세월이 흘렀지만 그때의 기억들은 고스란히 뇌리에 남아 가끔 그 시절로 나를 이끈다.

내 나이 일곱 살 초등학교 일학년 때다. 11월의 첫 일요일 아침 갑자기 들려오는 총소리에 놀라 먼발치를 쳐다봤더니, 어깨에 죽창을 멘 장정들이 지금의 이중섭 거리 왼쪽 골목길을 따라 시커멓게 몰려오고 있었다. 삽시간에 우리 집 유리창이 깨지고, 겁에 질린 식구들은 무작정 맨발로 뛰쳐나와 몇 백 미터 아래 있는 남의 집 대나무 밭에 몸을 숨겼다. 무서움에 떨던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상공에서 비행기가 몇 번 선회하고 사라진 후에야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아침까지 멀쩡했던 집은 화마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잿더미에 불씨들은 그때까지 타고 있었다. 어머니는 무작정 그 불길 속으로 뛰어들려는 순간 아이고 삼촌.”하며 문간방 젊은이가 껴안아 말렸다.

언니는 그날아침 분홍색 명주치마 노랑저고리로 내 옷을 갈아입혀 주었다. 얼마나 용을 썼으면 내 치마가 다 해졌을까. 평화롭고 고요했던 휴일 아침, 날씨는 화창한데 마을은 지옥이었다. 잿더미 옆에는 타다 남은 비단 천 쪼가리들이 나부끼고, 엉켜 붙은 유리조각들도 여기저기 흩어져있어 그야말로 참상이었다. 이웃 사람들은 이불 보따리며 세간사리 들을 서쪽 전매청 넓은 마당에 내다 놓았지만 우리 식구는 가재도구 하나 건지지 못한 빈 몸이었다. 급한 대로 우리는 이모님 댁에서 얼마동안 신세를 져야했다. 소식을 접한 아버지가 서울의 직장을 접고 급히 내려왔다. 우리 다섯 식구는 부엌도 없는 쪽방을 겨우 얻어 피난살이 하듯 웅크리고 살아야 했다. 당장 집을 지으려 해도 자재 구하기가 힘든 상황이었지만 아버지는 어려움 속에서도 집을 짓기 시작 했다. 불운은 겹쳐오는 것일까. 당시 서귀면장으로 부임한 아버지는 1950년 한국전쟁 발발 후 칠월 중순 어느 날, 출근 한 뒤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짓던 집은 덩그러니 기둥만 세워 놓은 채. 4·3 후유증이 아물기도 전에 그 연장선상에서 제주에 주둔했던 해병대가 예비검속으로 아버지를 끌고 가서 바다에 수장 시켜버린 것이다. 군인들이 먹을 상당량의 부식(한 시간 내로 소 몇 마리와 고사리 몇 백관)을 요구했지만, 한 고을 수장인 아버지는 4·3의 후유증과 6·25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민초들을 보호해야 했었기에, 그 명령을 과감히 거절한 것이 죄였다. 보복은 참혹했다. 당시 국가 위정자들은 국민을 보호할 의무는 망각한 채, 무고한 양민을 희생 시키고 시신마저 찾을 수 없게 산 채로 수장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동네가 아수라장이 되기 전만 해도, 솔동산은 서귀포의 명동이라 할 만큼 부유층들이 살던 번화가였다. 산사람(공비, 우리는 그들을 폭도라고 불렀다.)들은 솔동산 입구에서 길 서쪽에 있는 우리 집 까지만 불을 질렀다. 길 동쪽에 있는 앞집들은 아무 일도 없는 듯 멀쩡했다. 우리 집이 요주의 대상이었을까. 결국 아버지는 공비들이 아닌 국가의 공권력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지금도 유족의 눈물은 마르지 않은 채, 소리 없는 절규는 초토화 되었던 이 땅에 아직도 미완으로 남았다.

 

한국 전쟁 후 제주 서귀포에도 피난민들이 밀려들었다. 당시 내 나이 아홉 살, 초등학교 삼학년 무렵이다. 우리 반에도 피난 온 아이들이 있었다. 그중 내 짝은 군인 장교 딸인 서울 아이었다. 갈색 머리에 보조개가 예쁜 아이. 연필 한 자루도 귀할 때 그 아이에게는 학용품이 많았다. 쉬는 시간이면 그 애는 내 손을 끌어다 색연필로 손톱을 빨갛게 칠을 해주곤 했다. 마치 봉숭아물을 들인 것처럼. 사학년 때 나는 건강이 좋지 않아 한 학기를 쉬었다. 다음 학기에 학교를 갔더니 옆자리의 그 애는 아버지를 따라 이미 어디론가 떠난 후였다. 서운함에 눈물이 핑 돌았다. 다른 친구들이 눈치 챌까봐 천장을 보며 애써 눈물을 삼켰다. 예쁘고 귀여웠던 그 아이. 예기치 않은 전쟁으로 이곳 서귀포까지 와서 내 짝꿍이 되었던 그 애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살아 있다면 흰 머리에 주름도 생겼을 터. 잠깐 스쳐 지난 인연이라 나를 기억이나 할까. 아직도 그 이름은 기억에 또렷이 남아 그리움이 밀려올 때면 눈시울이 젖는다.

피난 온 아이 중 또 한 아이가 있다. 그 애도 내게는 잊지 못할 그리운 친구다. 단발머리에 피부가 하얗고 조용한 아이였다. 영어는 A, B, C, D 도 모르던 시절, ‘반짝 반짝 작은 별.’이라는 동요를 영어로 배워 주었다. ‘팅클 팅클 리틀 스타 하우 아이 원더 웥 유 아’(Twinkle Twinkle Little Star, how I wonder what you are) 오빠가 영어를 잘한다며 오빠에게서 배운 노래를 나와 또 다른 친구에게 가르쳐 주었다. 우리들 셋 중, 나만 토박이였고 둘은 피난 온 친구였다. 언젠가 사진을 정리하다 보니 셋이 찍은 사진이 있었다. 누가 찍어 줬는지 몰라도 아주 귀중한 것이라 잘 간직 했었는데 어쩌다 그것마저 잃어버렸다. 얼마나 서운한지. 초등학교 사진은 겨우 그것 한 장 뿐이었는데 이제는 추억 속에서만 맴돌 뿐. 사진 속에 나는 그 아이의 외투를 입고 있었다. 야윈 내 모습이 얼마나 안쓰러웠으면 내게 옷까지 입혀주었을까.

그 애도 살아 있다면 할머니가 됐을 터. 보고 싶다.

아픔 없는 삶이 어디 있으며 굴곡 없는 생이 어디 있으랴. 아픈 역사에 스치듯 살아온 지난날들이 꿈인 듯하여, 눈감으면 어린 날의 추억에 가슴 시리고, 보고픈 사람 이름을 가만히 부르면 어느새 그들이 내 안에 고즈넉이 자리를 잡고 있다.

성 수자.’ ‘조 유리분.’ 추억 한 자락이 목울대를 적신다.

 

추억의 얼굴은 늙지 않는다고 했던가. 인생이 깊어질수록 내 유년의 기억들은 아릿한 추억이 되어 세월이 더할수록 애절함으로 다가온다.
이 고장에 불어 닥쳤던 4·3의 상흔과 6·25의 잔상들은 아직도 내 마음 깊은 곳에 자리하고 있는데 세월 따라 그리운 이들은 가고 없다.
 
제주 4·3사건은 공권력에 의해 도민을 무차별하게 학살한 끔찍한 참사다. 그 통한의 역사는 70여년 세월이 흘렀지만 그때의 기억들은 고스란히 뇌리에 남아 가끔 그 시절로 나를 이끈다.
내 나이 일곱 살 초등학교 일학년 때다. 11월의 첫 일요일 아침 갑자기 들려오는 총소리에 놀라 먼발치를 쳐다봤더니, 어깨에 죽창을 멘 장정들이 지금의 이중섭 거리 왼쪽 골목길을 따라 시커멓게 몰려오고 있었다. 삽시간에 우리 집 유리창이 깨지고, 겁에 질린 식구들은 무작정 맨발로 뛰쳐나와 몇 백 미터 아래 있는 남의 집 대나무 밭에 몸을 숨겼다. 무서움에 떨던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상공에서 비행기가 몇 번 선회하고 사라진 후에야 우리는 집으로 돌아왔다. 아침까지 멀쩡했던 집은 화마로 흔적도 없이 사라지고, 잿더미에 불씨들은 그때까지 타고 있었다. 어머니는 무작정 그 불길 속으로 뛰어들려는 순간 아이고 삼촌.”하며 문간방 젊은이가 껴안아 말렸다.
언니는 그날아침 분홍색 명주치마 노랑저고리로 내 옷을 갈아입혀 주었다. 얼마나 용을 썼으면 내 치마가 다 해졌을까. 평화롭고 고요했던 휴일 아침, 날씨는 화창한데 마을은 지옥이었다. 잿더미 옆에는 타다 남은 비단 천 쪼가리들이 나부끼고, 엉켜 붙은 유리조각들도 여기저기 흩어져있어 그야말로 참상이었다. 이웃 사람들은 이불 보따리며 세간사리 들을 서쪽 전매청 넓은 마당에 내다 놓았지만 우리 식구는 가재도구 하나 건지지 못한 빈 몸이었다. 급한 대로 우리는 이모님 댁에서 얼마동안 신세를 져야했다. 소식을 접한 아버지가 서울의 직장을 접고 급히 내려왔다. 우리 다섯 식구는 부엌도 없는 쪽방을 겨우 얻어 피난살이 하듯 웅크리고 살아야 했다. 당장 집을 지으려 해도 자재 구하기가 힘든 상황이었지만 아버지는 어려움 속에서도 집을 짓기 시작 했다. 불운은 겹쳐오는 것일까. 당시 서귀면장으로 부임한 아버지는 1950년 한국전쟁 발발 후 칠월 중순 어느 날, 출근 한 뒤 끝내 돌아오지 못했다. 짓던 집은 덩그러니 기둥만 세워 놓은 채. 4·3 후유증이 아물기도 전에 그 연장선상에서 제주에 주둔했던 해병대가 예비검속으로 아버지를 끌고 가서 바다에 수장 시켜버린 것이다. 군인들이 먹을 상당량의 부식(한 시간 내로 소 몇 마리와 고사리 몇 백관)을 요구했지만, 한 고을 수장인 아버지는 4·3의 후유증과 6·25 전쟁의 소용돌이에서 민초들을 보호해야 했었기에, 그 명령을 과감히 거절한 것이 죄였다. 보복은 참혹했다. 당시 국가 위정자들은 국민을 보호할 의무는 망각한 채, 무고한 양민을 희생 시키고 시신마저 찾을 수 없게 산 채로 수장하는 만행을 저질렀다.
동네가 아수라장이 되기 전만 해도, 솔동산은 서귀포의 명동이라 할 만큼 부유층들이 살던 번화가였다. 산사람(공비, 우리는 그들을 폭도라고 불렀다.)들은 솔동산 입구에서 길 서쪽에 있는 우리 집 까지만 불을 질렀다. 길 동쪽에 있는 앞집들은 아무 일도 없는 듯 멀쩡했다. 우리 집이 요주의 대상이었을까. 결국 아버지는 공비들이 아닌 국가의 공권력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지금도 유족의 눈물은 마르지 않은 채, 소리 없는 절규는 초토화 되었던 이 땅에 아직도 미완으로 남았다.
 
한국 전쟁 후 제주 서귀포에도 피난민들이 밀려들었다. 당시 내 나이 아홉 살, 초등학교 삼학년 무렵이다. 우리 반에도 피난 온 아이들이 있었다. 그중 내 짝은 군인 장교 딸인 서울 아이었다. 갈색 머리에 보조개가 예쁜 아이. 연필 한 자루도 귀할 때 그 아이에게는 학용품이 많았다. 쉬는 시간이면 그 애는 내 손을 끌어다 색연필로 손톱을 빨갛게 칠을 해주곤 했다. 마치 봉숭아물을 들인 것처럼. 사학년 때 나는 건강이 좋지 않아 한 학기를 쉬었다. 다음 학기에 학교를 갔더니 옆자리의 그 애는 아버지를 따라 이미 어디론가 떠난 후였다. 서운함에 눈물이 핑 돌았다. 다른 친구들이 눈치 챌까봐 천장을 보며 애써 눈물을 삼켰다. 예쁘고 귀여웠던 그 아이. 예기치 않은 전쟁으로 이곳 서귀포까지 와서 내 짝꿍이 되었던 그 애는 지금 어디에 있을까. 살아 있다면 흰 머리에 주름도 생겼을 터. 잠깐 스쳐 지난 인연이라 나를 기억이나 할까. 아직도 그 이름은 기억에 또렷이 남아 그리움이 밀려올 때면 눈시울이 젖는다.
피난 온 아이 중 또 한 아이가 있다. 그 애도 내게는 잊지 못할 그리운 친구다. 단발머리에 피부가 하얗고 조용한 아이였다. 영어는 A, B, C, D 도 모르던 시절, ‘반짝 반짝 작은 별.’이라는 동요를 영어로 배워 주었다. ‘팅클 팅클 리틀 스타 하우 아이 원더 웥 유 아’(Twinkle Twinkle Little Star, how I wonder what you are) 오빠가 영어를 잘한다며 오빠에게서 배운 노래를 나와 또 다른 친구에게 가르쳐 주었다. 우리들 셋 중, 나만 토박이였고 둘은 피난 온 친구였다. 언젠가 사진을 정리하다 보니 셋이 찍은 사진이 있었다. 누가 찍어 줬는지 몰라도 아주 귀중한 것이라 잘 간직 했었는데 어쩌다 그것마저 잃어버렸다. 얼마나 서운한지. 초등학교 사진은 겨우 그것 한 장 뿐이었는데 이제는 추억 속에서만 맴돌 뿐. 사진 속에 나는 그 아이의 외투를 입고 있었다. 야윈 내 모습이 얼마나 안쓰러웠으면 내게 옷까지 입혀주었을까.
그 애도 살아 있다면 할머니가 됐을 터. 보고 싶다.
아픔 없는 삶이 어디 있으며 굴곡 없는 생이 어디 있으랴. 아픈 역사에 스치듯 살아온 지난날들이 꿈인 듯하여, 눈감으면 어린 날의 추억에 가슴 시리고, 보고픈 사람 이름을 가만히 부르면 어느새 그들이 내 안에 고즈넉이 자리를 잡고 있다.
성 수자.’ ‘조 유리분.’ 추억 한 자락이 목울대를 적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