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판 망신형 ‘피의사실 공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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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동수 논설위원

“재판받다 죽는 사람은 거의 없다. 거의 다 수사받다가 자살한다.” 지난 19일 퇴임한 송인택 전 울산지검장이 한 언론과의 통화에서 한 말이 신문 지면에 소개됐다. 그러면서 “피의자가 재판받기도 전에 얼굴에 X칠해 수사받는 사람이 살 방법을 없게 만들었다”라고 했다. 그가 언급한 것은 피의사실 공표(被疑事實 公表)다. 유·무죄가 확정되지 않았는데도 ‘피의(被疑)’라는 말처럼 수사 초기 단계에서 혐의나 의심을 받는 것을 공표해 다수가 알 수 있도록 하는 것이다. 일종의 망신형이라 할 수 있다.

형법엔 이를 ‘피의사실공표죄’로 처벌토록 하고 있다. 검찰이나 경찰이 직무를 행함에 있어 지득(知得·알고 득함)한 피의사실을 공판 청구 전에 공표해선 안 된다. 당사자가 나중에 무죄 판결을 받더라도 이미 회복할 수 없는 피해를 보게 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함이다.

▲피의사실공표죄는 1953년 제정된 후 지금까지 한 번도 개정되지 않은 채 유지되고 있다. 더욱이 흥미로운 것은 단 한 명도 이 죄로 처벌을 받은 사례가 없다. 오히려 검·경은 국민의 알 권리라는 명분으로 피의사실을 마구 흘리면서 망신과 여론재판으로 당사자의 기를 꺾어 놓았다. 전직 대통령도 이로 인해 극단적인 선택을 했다.

그동안 사문화되다시피 했던 법 조항이 불현듯 되살아나 검·경을 옥죄고 있다. 울산지검이 최근 약사면허증을 위조한 가짜 약사를 검찰에 송치하면서 관련 보도자료를 낸 것과 관련해 피의사실 공표 혐의를 적용해 울산경찰청 광역수사대장 등 2명을 입건했다. 검찰이 피의사실 공표를 수사한 첫 사례다. 더욱이 대검찰청 검찰수사심의위원회는 이 사건에 대해선 수사를 계속해야 한다고 결정하면서 해당 경찰관들은 재판에 넘겨질 가능성이 높다.

이런 상황에서 검찰도 피의사실 공표 혐의로 경찰의 수사를 받게 됐다. 피장파장인 셈이다. KT에 딸을 부정 채용시킨 혐의로 기소된 김성태 자유한국당 의원이 자신을 수사한 검사장 등 수사 지휘 라인 검사 3명을 피의사실 공표 혐의로 서울경찰청에 고소했다. 당사자 고소라 검찰에 대한 경찰 수사 착수는 불가피해졌다.

▲‘남우세’라는 말이 있다. 남에게 비웃음과 놀림을 받는 것은 말한다. 때론 주먹질 당하는 것보다 손가락질받는 것이 두렵다. 이번 기회를 통해 잘못된 수사 관행을 바로 잡아야 한다. 진짜 사문화해야 할 것은 인권을 까뭉개는 망신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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