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수(白水) 선생을 기리며
백수(白水) 선생을 기리며
  • 제주신보
  • 승인 2019.08.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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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길웅. 칼럼니스트

연전, 오영호 시인이 본지 〈해연풍〉에 백수 선생을 제주에서 뵙던 얘기를 썼던 게 기억에 남아 있다. 선생의 시조세계에 경도돼, 통속을 벗어난 그분의 고일(高逸)한 인품을 지극히 외경하는 소회를 토설한 글이었다. 저명한 중앙 문인에 연이 닿아 쓴 흔치 않은 글이라 정독하며 행간까지 너끈히 훔쳤었다.

한국문인협회 기관지 『月刊文學』(2019.8. 제606호)을 받아 앉았더니, 표지인물이 낯익지 않은가. 몇 장 넘기는데, 기획특집에 ‘탄생 100주년 정완영의 삶과 문학’이라 했다. 선생이 서거하신 것도 까무룩 모르고 있었다. 비록 선생과 닿은 연이 없다 하나 부끄러운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1919년에 태어난 선생이 3년 전 8월에 서거하셨고 또 세 해 지나 2019년, 탄생 100주년이다. 새삼 덧없는 게 인생사인가 한다.

뜻밖의 일. 책장을 막 넘기려는데 눈앞으로 시 한 편이 내려오는 게 아닌가.



“행여나 다칠세라 너를 안고 줄 고르면

떨리는 열 손가락 마디마디 에인 사랑

손닿자 애절히 우는 서러운 내 가얏고여.”(후략)




둥기둥 둥기둥. 별안간 선생이 열두 줄 가야금을 당신 품에 부여안고 줄을 타며, 시린 가슴을 쓸어내리는 것만 같다. 떨리고 에고 마침내 울어 ‘서러운 가얏고’는 우리 조국이다. 선생의 나라사랑의 마음을 애절히 노래한 이 시조에서 우리는 조국애의 곡진함에 목메면서,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선생의 맑은 영혼과 조우한다.

몇 년을 두고 『고등국어』에 실렸던 연시조 첫 수다. 국민적 공감을 얻은 시조라 독자께서도 추억의 장에 되살아나리라. 교단에서 이 시를 가르치며 가슴 울렁거리던 게 엊그제 일로 떠오른다. 시를 보면. 한자어 하나마저 용납지 않은 순우리말이다. 고유어가 이토록 어여쁘고 보드랍고 섬세하고 애틋할 수 있는가. ‘행여나’에 울컥하더니 ‘서러운 내 가얏고’에 이르러 숨이 꽉 막혀 오지 않는가.

아호 ‘白水’는 깨끗하고 맑은 물이다. 티끌 하나 내려앉아도 흠결이 되는 완미함. 시조에 문외한이나 외람되이 선생의 작품세계를 기웃거린다. 자신을 ‘기인’이라 했듯 좀 특이한 어른이었다. “서른여섯에 직업을 놨어요. 직업을 가지고는 시를 못 쓰겠어요. 아예 포기해 버렸어.… 자나 깨나 시조에 매달렸어. 근 50년을 하루 열 시간씩을 시조에 매달린 거야.”

한평생, 돌아가실 때까지 오직 시조만을 위해 온몸을 불사른 분이 백수다. 선생을 일컬어 ‘숭고한 시조의 순교자’라 한 이유를 어렴풋이나마 알 것 같다. 선생은 다양한 시적 소재를 통해 한국의 전통 정서인 한‘(恨)’을 조국에 대한 애정으로 승화시켰다. 거기 덧대 전통적 서정에 준거해 자연관조의 세계를 시화했다.

“시조 한 수에 담지 못할 세계가 없다.”, “시조는 우리 모국어로 빚어 올릴 수 있는 가장 아름다운 시 그릇이다.”, “시는 무력한 것, 부드러움이요, 봄비에 우주가 풀리듯 시는 타이름이며 자족할 줄 아는 여유요, 치유이다.”

귓속으로 살촉같이 날아와 꽂히는 말이 있다. “족보는 안 갖고 다녀도 퇴고할 작품은 갖고 다닌다.”라 한 말씀. 그토록 시종 창작에 몰두했던 선생의 영전에 옷깃을 여민다. 우리는 시조라는 좋은 종교를 가졌다 한 당신의 목소리에 다시 귀를 세운다.

백수 정완영 선생, 그는 장르를 넘어 문학의 자존심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