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외의 추억
물외의 추억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 페이스북
  • 제주의뉴스
  • 제주여행
  • 네이버포스트
  • 카카오채널

박상섭 편집위원

1970년대 초로 기억한다. 여름이면 마을 가까운 밭에 물외가 지천이었다. 길을 가다가 물외 하나 따서 먹어도 큰 소동이 없던 시절이었다. 물외 하나를 반으로 뚝 꺾어서 입으로 대충 껍질을 벗겨낸 후 먹으면 달달했다.

따서 먹을 물외 선택도 잘 해야 한다. 겉 색깔이 짙은 노란색이면 늙은 물외라서 그다지 맛이 좋지 않았다. 이런 물외는 농가가 따서 말린 후 씨앗을 얻기 위한 것이다. 연녹색인 어린 물외는 너무 작아서 따 봐도 먹을 게 없다.

사람으로 치면 청년과 같은 짙은 녹색의 물외가 맛있다. 모양도 제각각이다. 익어도 구부러지고 키 작은 물외는 값을 많이 쳐주지 않는다. 칼로 껍질을 깎을 때에도 구부러진 부분은 깎기 어렵다.

감귤로 말하면 파치와 다름없다.

두께가 일정하면서도 길쭉한 물외가 최고다.

마을에서 제일 차가운 공중수돗물을 길어다가 된장을 풀고 물외를 썰어 넣으면 맛있는 물외냉국이 된다.

▲이듬해 여름부터 물외가 사라지고 오이가 번지기 시작했다. 농가들이 너도나도 물외 대신 오이를 심기 시작한 것이다. 대유행이었다. 마을 주변에 물외를 찾아보기 힘들 정도였다. 오이 줄기가 땅에 세운 대나무나 나무막대를 휘감고 올라가며 오이를 만들어 냈다.

물외는 땅에서 자란다. 땅에는 농촌 냄새나는 이런 저런 퇴비도 있다. 물외는 퇴비와 함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오이는 나무막대에 올라가며 퇴비와 거리를 뒀다. 오이도 물외처럼 구부러진 것도 있으나 그렇지 않은 것은 키도 크고 늘씬한 몸매를 지녔다.

물외는 농촌사람이고 오이는 도회지 사람처럼 보였다. 도마에서 오이를 썰 때면 크기가 똑같아 공산품처럼 보였다. 지금의 기준으로 보면 소시지를 잘라 내는 느낌이다. 처음 접해 보는 것이라 맛도 오이가 더 좋았다.

1970년대 초 이후 오랫동안 나의 입맛은 오이를 벗어나지 못했다.

▲그런데 언제부터인가 물외가 조금씩 나오기 시작했다. 입맛이 바뀐 것인지, 유년의 기억 때문인지 요즘 나는 물외에 빠졌다.

수분이 많은 물외의 씹는 질감은 오이에 비할 데가 아니다. 오이는 된장에 찍어 먹어도 융합되지 못하고 따로 노는 느낌이지만 물외는 다르다. 된장의 짠 맛을 물외의 수분으로 녹이면서 맛이 더 살아난다.

그러니 술상에서도, 밥상에서도 나의 손은 늘 물외로만 간다. 여름이 맛있는 것이다.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