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의 선택
아빠의 선택
  • 제주신보
  • 승인 2019.09.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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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재철, 제주대학교 중어중문학과 교수/논설위원

우리 부부는 직장을 가졌다는 이유로, 아이들을 외가에 보내어 키웠다.

큰 아이는 어쩌다 한 번씩 나타나는 엄마 아빠에게 보살핌을 받지 못한 것은 물론이고, 등하굣길에는 동생까지 데리고 다녀야 했기 때문인지는 모르나, 놀랍도록 독립적으로 성장하였다. 반면 그나마 언니의 보호를 받으며 자란 작은 아이는 언니에게 받은 만큼 주위의 아픔을 함께할 줄 아는 푸근한 아이로 성장하였다. 그래서일까? 지금은 부모 말은 귀담아 듣지 않아도, 언니 말은 진리라도 되는 양 생각하는 것 같다.

‘한 배 속의 자식도 아롱이다롱이’라고 이렇게 서로 다르게 성장했지만, 우리 부부가 항상 했던 이야기를 따라 아이들에겐 공통점이 있다.

“갖고 싶은 것이 있으면 반드시 스스로 노력해서 가질 것이요, 내 것이 아닌 것은 절대 취하지 말라.”는 원칙과 “엄마 아빠는 너희들을 대신해 줄 수 없다. 각자 자기의 자리에서 최선을 다하다가 서로에게 부끄럽지 않게 그리고 당당하게 만나자.”이다.

아이들은 부모가 바쁘고, 도와줄 능력도 없고, 도와줄 생각도 없어서, 각자가 자기 일은 자기가 개척해 왔다.

한 번은 큰 아이가 “아빠가 우리에게 해 주신 것이 뭡니까? 때 되면 나타나 용돈이나 주셨죠.”라고 말한 적이 있다. 그때는 서운했는데, 지금 생각해 보니, “남들은 스펙도 쌓아주고 장학금도 받아주는데, 아빠는 우리를 위해 무엇을 했느냐?”는 푸념이었던 것으로 느껴진다.

“미안하다, 아빠가 죄인이다.”

어떤 아비는 드러난 지난 행적 때문에 이제야 눈물을 흘리지만, 나는 지금까지도, 도와줄 능력도 생각도 없어서, 홀로 고군분투하는 아이들을 쳐다보며, 하루하루가 고통스러웠고, 수없이 많은 눈물을 흘리며 살아왔다. 그리고 아직도 그렇게 바보처럼 살고 있으며, 남의 비리를 보면 내 자식의 고통을 떠올리며 분개할 뿐 다른 능력은 없다.

세상의 어떤 부모가 자식의 고통에 초연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때로는 방치할 수 있어야 한다. 힘들어하는 것이 안타깝다고 방법이 아닌 방법으로, 자식의 손을 잡아주었다가, 온 세상에 비리가 밝혀지면, 앞으로 그 자식은 어찌 살겠는가?

두꺼비는 배 속에 알을 품게 되면, 일부러 뱀과 싸움을 걸어 잡혀 먹힘으로써, 뱀의 몸 안에서 알을 부화시켜 새끼가 태어나게 한다고 하며, 사마귀는 짝짓기를 하고난 뒤에 수컷이 암컷에게 먹혀, 그 자양분으로 암컷은 알을 낳고 새끼를 키운다고 한다.

수사의 칼끝이 가족에까지 미치게 되자, 자살을 택한 사람도 있다. “잘못이 없다면서 끝까지 무고를 밝혀야지 죽기는 왜 죽어?”라고 생각하며, 그의 결백을 굳게 믿었었는데, 문득 생각나는 것이 있다. 혹 그분은 “털면 먼지라도 날까? 설령 이유가 부당하다고 하더라도, 남겨진 나의 가족이 손가락질이라도 받지 않을까?”라는 깊은 고뇌에 빠졌던 것은 아닐까? 그의 가족 사랑이 비장하게 느껴진다.

버텨서 눈앞의 이익을 취하면, 길면 수년 일지 모르나, 앞날이 창창한 자식은 어이할꼬? 물러나야 할 때 물러날 줄 아는 것도 교육이다. 아비의 과거는 자식의 미래가 된다.

그나마 끝을 잘 맺고자 한다면, 잘못 끼운 첫 단추는 풀어서 다시 끼워야 한다.

방안에 물건이 가득 채워져 있으면, 비워야 다른 것을 채울 수 있듯이, 마음속의 집착을 내려놓아야, 그나마 다른 것을 채울 수 있는 것이다. 내려놓으면, 내 권력은 잃어도 자식의 미래는 그나마 평탄할 수 있을 터인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