혼정신성(昏定晨省)
혼정신성(昏定晨省)
  • 제주신보
  • 승인 2019.1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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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권일(농업인·수필가)

어머니가 넘어졌다.

구순(九旬)의 노모가, 집 뒤 감귤텃밭에서 미끄러져 다리를 다쳤다.

해가 갈수록 살과 근육 빠져나가, ‘자코메티의 조각 같은 결핍으로 내 가슴을 헤집는 노구(老軀). 설상가상으로, 90년 인생길에서 굳건하게 몸을 지탱해 주었던 두 다리마저 고목처럼 폭삭 무너져 내린 것이다.

옴짝달싹 못한 채 속수무책이었던 어머니의 시간. 그러나 부축해 일으켜줄 도움의 손길 하나 없었다. 사고무친(四顧無親)의 절대고독. 고통과 절망은 온전히 어머니의 몫이었다.

여느 때라면, 처마를 잇대고 사는 우리 부부에게 도움을 청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런데 사달이 나려고 했는지, 나는 육지 출타 중이었고 아내는 종일 감귤원에 농약 살포하느라 파김치가 되어, 어머니를 살피지 못했다. 하루 동안 속수무책으로 방치되었던 어머니의 공포와 허망함 얼마나 깊었을까.

예로부터, 부모님께 출필고반필면(出必告反必面)을 빼먹으면 안 된다고 배웠다.

집을 비울 때 반드시 말씀드리고, 귀가하면 얼굴 뵙고 인사를 드리라고 하는 당연한 예()이다. ‘출필고(出必告)’는 했다. 서울에 다녀 오겠다는 말씀은 드렸는데, 돌아왔다는 반필면(反必面)’ 드리기 전에 사달이 난 것이다.

안절부절 못하는 장남에게, 어머니는 멍든 다리 내보이며 멋쩍은 듯 쓸쓸하게 웃었다. 그리고는 그날의 전말(顚末), 조곤조곤 누에고치의 실처럼 허옇게 풀어 냈다. 고자질처럼.

해거리하는 감귤나무에 무성한 여름 순이 눈에 거슬려, 전정을 하기 위해 사다리에 올랐다가 다리맥이 풀려 널브러졌다. 기다시피 겨우 방에는 들어갔지만, 온몸이 말을 안 들어 물 한 모금 마시지 못하고 끼니도 챙기지 못한 채, 종일 시체처럼 누워 있었다. 한편으로는, 살 만큼 살았으니 이쯤에서 명줄을 놓아버려도 여한이 없다는 생각이 간절했다

절절한 하소연에, 가슴이 미어져 내렸다.

저녁에 잠자리 챙겨드리고, 아침에 안부를 묻는 혼정신성조차 제대로 못해 드린 내 자신의 불효에 얼굴을 들 수 없었다. 만에 하나, 어머니의 낙상(落傷)이 돌이킬 수 없는 중상(重傷)이었다면 어찌 되었을까. 생각만으로도 끔찍하여 모골이 송연해 졌다.

요즘, 홀로 사는 노인들이 위험하다.

부모님 모시고 살면서, 정성으로 보살피고 섬기던 전통적인 미덕이 실종되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 독거노인들의 빈곤과 외로운 죽음이 줄을 잇고 있다.

2018년 기준, 우리나라 65세 이상 노인가구 중 독거노인 비율은 19.4%143만 명에 이르며, 노인들의 고독사도 6년 새 두 배로 늘었다 한다.

노인!

누구도 피할 수 없는 숙명. 그리하여 살아있는 자들이 언젠가는 맞닥뜨릴 가 보지 못한 미래’. 빈부귀천 예외 없이 누군가의 보살핌이 간절한 속수무책의 그 시간이 온다.

노인이 소외되고 방치되어, 고독한 삶과 쓸쓸한 죽음으로 내몰리는 파렴치한 세상을 끝내야 한다. 노인들에게 혼정신성 다하는 경로효친의 나라, 대한민국의 부활을 간절히 소망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