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日에 뺏긴 국권 찾기 위해 ‘무오년 항일 운동’ 이끌어
(111)日에 뺏긴 국권 찾기 위해 ‘무오년 항일 운동’ 이끌어
  • 박형준 기자
  • 승인 2019.11.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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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일, 교도들에게 항일 사상 고취
김영교, 고려대 농과대 학장 등 역임
김영국, 제주지법 판사·법원장 지내
김영권, 향교훈장·보성의숙 초대 숙장
김영갑, 사진가…두모악 갤러리 설립
서귀포시 하원동 법정사 일대에 세워진 의열사 전경. 2004년 준공됐으며, 김연일 주지 등 항일지사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서귀포시 하원동 법정사 일대에 세워진 의열사 전경. 2004년 준공됐으며, 김연일 주지 등 항일지사의 위패를 봉안하고 있다.

김연일金蓮日1871(고종8)~1940(일제강점기), 무오년 법정사의 항일 운동. 법정사 주지. 호적상 이름은 김기인金基寅, 본관은 김해, 경상북도 영일군 동해면 도구리에서 김대근金大根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1914년 제주도로 들어와 중문면에 있는 법정사의 주지로 있으면서 항상 교도들에게 항일 사상을 고취시켰다. 1918년 당시 법정사에는 김연일, 정구용鄭九龍, 장임호張林虎 7명이 입도, 법정사에 체재하고, 또 제주 출신 승려 강창규姜昌奎와 방동화房東華와 함께하면서 한층 세력이 강화되었다. 이들은 동년 6월경 산북 산천단山川壇에서 항일거사 성취를 위한 백일기도에 들어갔다.

동년 8월 방동화는 선도교仙道敎 수령 박명수朴明洙(일명주석)를 찾아가 찬성을 얻으면서 선도교 세력을 운동에 합류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 선도교는 1922년에 이르러 보천교普天敎로 개칭된 종교로써 도내에 세칭 2만여 명의 교도를 가진 민족종교였다. 김연일과 함께 하는 항일세력은 1918919(815) 법정사에서 행해지는 불교 의식인 우란분제盂蘭盆祭에 참석한 남녀 교도 30여 명에게 저항의지를 밝혔다. 일제 축출과 국권 회복이란 양대 목표를 성취하기 위해 일본인 관리를 죽이고, 일본 상인들을 몰아낸다는 구체적인 방침을 설정했다. 이후 도내 각처에서 모여온 진압대에 의해 서호리에서 대치하던 박명수 부대는 퇴각되고, 결국 38명의 봉기 주동자 전부가 체포되었다. 정부는 1993년 광복절에 김연일에 건국훈장 애족장을 추서했다.

 

김영교金榮敎1933(일제강점기)~? 농학박사, 대학 교수, 고려대 농과대 학장, 축산학회 회장, 본관 광산, 제주시 이호2<오도롱> 김진근의 아들로 태어나 제주농고를 졸업했다.

그는 1961년 일본 기후대학 농학전공 졸업, 1963년 일본 북해도대학 대학원 축산가공학전공 졸업. 1966년 일본 북해도대대학원 축산가공학전공 농학박사를 지냈다.

또한 그는 1979~1981년 고려대 농과대 학장, 1980~1984년 유가공연구회 회장, 1981~1984년 고려대 식량개발대학원 원장, 1983년 축산학회 부회장, 1985년 고려대 병설 식량자원연구소 소장, 1986년 고려대 자연자원대학 축산학과 교수, 1991년 고려대 교수협의회 회장 등을 지냈다.

 

김영국金英國1923(일제강점기)~1966, 법관. 제주지방법원장. 본관은 광산, 제주시 이도동<제주-성안>에서 김창희金昌禧의 차남으로 태어났다.

김창희는 광복 후 초대 제주경찰서장을 지냈다.

김영국은 광주사범학교 입학하고 4년을 수료, 1948년 광복 후 시행한 법관 임용고시에 합격했다.

19491219일에 제주지법 판사로 임명됐다.

3년 재임하고, 서울고법 부장판사를 역임했다.

이후 광주지법 목포지원 및 순천지원 판사, 서울지법 인천지원장, 서울고법 판사 등을 거쳐 1963년 제주지방법원장으로 금의환향하였다.

 

 

김영권金永權1887(고종24)~1951, 향교훈장, 개량서당 숙장, 자는 자형子衡, 호는 시암蒔菴, 본관은 나주, 제주시 영평 상동<가시나->에서 김윤선金倫先4남으로 태어나고 양부는 김기석金基錫, 김치용金致鏞(1832~1901)은 양할아버지다.

김영권은 제주향교의 여러 직임職任을 거쳤고 또 제주향교 훈장에 추천되었다.

그 내용은 지금 영평寧坪초등학교 교문을 들어서면 우측(동쪽)에 있는 기념비에 새겨져 있다.

그는 보성의숙을 초대 숙장을 지냈고 한편 유림대표에 뽑혀 일본을 시찰했다.

그는 2세 교육을 목적으로 육지로 이주해 충남 논산읍 지산동에 정착했다.

이후 논산읍에 있던 시암공의 묘가 이장돼 영평동에 부인의 묘와 함께 안장됐다.

 

김영갑갤러리 두모악 외부 전경.
김영갑갤러리 두모악 외부 전경.

김영갑金永甲1957~2005, 사진작가, ‘김영갑갤러리-두모악설립자로 유명. 그는 충남 부여에서 태어나 학력은 부여 홍산중학교를 졸업하고 한양漢陽공업고등학교를 졸업했다는 것만 알려져 있다.

김영갑은 제주에 반하고 사진에 미쳐 1982년부터 3년 동안 카메라 메고 서울과 제주를 오가며 사진작업을 하던 끝에 1985년에는 정착하여 20년간 온 섬을 누비며 제주도의 자연을 소재로 20만여 장의 사진 작품을 남겼다.

용눈이-오름에서 불과 20분 거리에 있는 김영갑갤러리-두모악은 고김영갑만큼이나 소중한 제주의 자산이다.

지독히도 제주도를 사랑했던 한 사진작가의 처절한 인생이 낳은 우리들의 갤러리다.

김영갑은 작곡가 김희갑金熙甲, 작사자 양인자梁仁子 부부가 비나 피하라고 사준 르망 자동차가 다 찌그러지도록 제주 곳곳을 누비고 다녔다.

1985년부터 해마다 서울과 제주에서 사진전을 열었는데 그중 태반이 제주의 오름이라는 주제였다.

2004년에 펴낸 그 섬에 내가 있었네라는 에세이집에서 김영갑은 대자연의 신비와 경외감敬畏感을 통해 신명과 아름다움을 얻는다.”고 할 정도로 제주의 자연을 사랑했다.

2002년에는 폐교된 삼달三達초등학교 분교장을 임대해 개조한 뒤 김영갑갤러리-두모악을 개관했다.

현재 김영갑갤러리-두모악에는 그가 찍은 20만여 장의 사진 작품이 소장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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