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끌어안다
시를 끌어안다
  • 제주신보
  • 승인 2019.11.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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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숙영 수필가

삶이 무거운 날엔 시를 찾게 된다.

좋은 시를 만날 때는 행운을 만난 것처럼 내 영혼이 환해진다.
해마다 여름철엔 책장을 정리한다. 불어난 책 중에서 보관해 두고 싶은 소중한 책과, 앞으로 꼭 읽게 될 책만 남기고 미련 없이 뽑아내면, 책장 속에 머물면서 나와 함께 늙어가는 오래된 시집들이 한결 빛나 보인다. 평생 시를 품고 사는 내 마음 밭에는, 어렸을 적 언니가 뿌린 한마디 말이 씨앗이 되어 꿈틀거리고 있다.

초등학생 시절인 50년대는 책이 아주 귀했다.
고등학생인 작은오빠는 나에게 책을 많이 읽어야 생각도 깊어지고 공부도 잘할 수 있다고 하면서, 동화책이나 동시집을 구해다 주곤 하였다. 여러 종류의 책 중에서 강소천의 「동요동시집」을 가장 좋아했다. 초등교단에 있던 둘째언니는 일요일마다 내 일기장을 검사했다. 어느 날 동시 형식으로 쓴 ‘복숭아꽃’에 대한 제목 일기를 보면서
“우리 막내 시인 되겠네.”
라고 희망을 담은 칭찬을 했다. 그 한마디로 시인이 되고 싶은 꿈 하나 남모르게 간직하게 되었다. 그 꿈은 막연해서 슬프고 속상도 했지만, 가슴은 늘 감미로웠다.
중학교 3학년 때다. 여름 방학이 끝나고 2학기 첫날, 교실 벽에는 ‘모란이 피기까지는’ 이라는 영랑의 시 액자가 걸려 있었다. 아이들은 “와, 와!” 함성을 지르며 저마다의 목소리로 낭독을 하기에 바빴다. 방과 후에는 먼저 암송한 친구가 교단에 올라서서 시낭송을 하기도 하면서 시를 사랑하는 마음들이 싹트기 시작했다.
국어선생님은 시 짓기 숙제를 자주 내었다. 꼬박꼬박 숙제를 잘해서인지 졸업할 때 혼자서 문예특기상을 받았다. 시인이 다 된 것 같은 그때의 설렘을 60년이 지난 지금도 잊지 못한다.

지난 7월 책장을 정리하다가 학급문집 ‘꿈꾸는 교실’이 눈에 띄었다.
얼른 꺼내어 동심과 함께 지낸 추억에 젖어보았다. 어린이들의 글짓기 작품을 읽을 때마다 순수하고 섬세한 감수성으로 표현한 글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동시·산문·일기문·독서감상문·편지글 등으로 엮어 ‘사학년 기념문집’ 을 펴냈다.
첫 장에는 학급가인 ‘꿈꾸는 교실’ 악보를 실었고 끝장에는 ‘학부형에게 드리는 담임의 글’로 마무리 하였다.
이 교실, 비록 좁은 공간이지만 이 속에서 자라나고 있는 어린이들은 저마다 아름다운 꿈을 키우며 쉬지 않고 속삭이고 있습니다. 이 속삭임을 매일 가까이서 들으며, 순진무구한 새싹들의 꿈을 한데 엮어 보았습니다. 4학년, 조금은 철이 든 개구쟁이 시절의 꿈이 먼 훗날 곱게 피어나길 바랍니다. ­
문집을 받고 자기의 작품을 찾으려고 책장을 넘기며 뿌듯해 하던 그 꼬마들, 지금 40대가 되었을 텐데 아직도 그 학급문집을 간직해 두었을까. 어린이들의 글을 읽을 때마다 언니가 나에게 한 것처럼, 그에 알맞는 칭찬을 아끼지 않으며 글짓기 지도에 관심을 기울이던 젊은 날의 교단생활이 그립기만 하다.
90년대에는 스승의 날을 전후한 교육주간에 도교육청이 주최하는 교원예술제가 있었다. 연극제·음악제·서예전·미전·시화전·사진전등 다양한 장르의 행사였다. 화가인 형부가 배경 그림을 그려주어서 시화전에 여러 번 출품했던 경험은 교직 생활의 소중한 추억이 되었고, 출품했던 작품들은 ‘나의 재산 품목 1호’ 가 되어 건넌방에 보관, 시의 향기가 방 안을 가득 채우고 있다.

시는 내 영혼의 등불이다.
어린 시절의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시를 향한 끝없는 사랑을 품은 내 인생을 스스로 찬미한다. 시의 씨앗을 뿌려준 언니의 ‘그 말 한마디’ 는 내 삶을 보듬어 주며 내 영혼을 아름답게 비춰주고 있다.
내일은 고향에 사는 언니를 찾아가 어리광 부리고 싶다.
“언니! 막내는 언니가 심어준 꿈을 끌어안고 시인처럼 살고 있어요.”
투병 중에 있는 언니가 빙그레 웃어 주겠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