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입신양명’ 이루기 위한 치열한 도전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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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과거 급제 향한 머나먼 여정
과거시험 급제 문 고시보다 좁아
섬 떠나 한양까지 수백리길 감내
조선시대 제주 문과 급제자 58명
표해록 저술 장한철, 고초 겪어
우여곡절 끝 5년 만에 꿈 이뤄내
지역적 한계로 출세 기회서 소외
불균형 해소하기 위해 별시 치뤄
어느 시대 어느 국가든 사회를 이끄는 엘리트는 중요한 존재들이다.
민주주의가 정착돼 많은 부분이 평등해 졌지만 엘리트는 여전히 존재한다.
따라서 엘리트를 얼마나 공정하게 선발하는가는 사회 안정과 발전을 위한 중요한 조건이다.
우리는 일찍부터 과거제도라는 전통 있는 엘리트 선발제도를 가지고 있었다.
재능 있는 사람은 시험이라는 비교적 공정한 방식으로 공직에 진출할 수 있도록 했고, 이런 인재 선발의 유산은 지금도 각종 공무원 시험, 고시 등의 형태로 살아 있다.
 
국가지정 보물 제322호로 지정된 관덕정. 제주 역사의 상징인 관덕정은 조선 세종 30년(1448년)에 병사들의 훈련과 무예훈련장으로 창건됐다.
관덕정에서는 과거시험과 각종 진상을 위한 봉진행사 등도 이뤄졌다. 

조선 시대의 과거 시험 중 문과는 지역에서 치러지는 초시, 초시 합격자를 모아 한양에서 치러지는 복시, 최종 합격 등수를 결정하는 전시 순으로 실시됐다.

전국에서 응시한 수백 수천명 중에서 최종적으로 33명을 선발했기 때문에 과거 급제의 문은 오늘날의 고시보다도 매우 좁았다.

특히 제주 사람들이 과거에 급제하는 것은 매우 힘들었다. 제주라는 섬을 떠나 바다를 건너고 수백리 먼 길을 걸어 한양까지 가서 문과에 급제한다는 것은 개인의 학문적 소양과 함께 고통을 극복하려는 의지가 있어야 가능했다.

필자는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고려와 조선 시대의 모든 과거 급제자를 정리해 한국역대인물종합정보’(http://people.aks.ac.kr)에 모으는 작업을 수행했다.

조선 시대 전체 문과 급제자는 15151명인데 이 중 거주지가 제주, 정의, 대정으로 기록된 사람들을 검색해 봤다. 그 결과 찾아낸 급제자는 58명 정도로 그리 많은 수는 아니었다.

그만큼 제주인의 급제는 힘들었다.

표해록
표해록

이런 험로를 뚫고 급제한 사람 중에 장한철(張漢喆, 1744~?)이 있었다. 장한철은 영조 때 제주도 애월에서 태어났다.

그는 한양에서 치러지는 과거를 보기 위해, 17701225일 장삿배를 타고 제주도 애월포를 떠났다. 그러나 전라도 해안에 이르러 노어도 앞바다에서 태풍을 만나 오키나와의 한 무인도에 표류했다. 이후 갖은 고초를 겪은 후 일본으로 가는 상선에 구조됐다.

우여곡절 끝에 그는 도중에 작은 배로 갈아타서 남해의 청산도에 도착했다. 그러나 고향으로 가지 않고 과거를 보기 위해 길을 나서 23일 한양에 도착해 과거에 응시하지만 결과는 낙방이었다. 177133일 서울을 떠나 58일에 마침내 제주에 귀향했다.

그는 다시 공부를 시작하면서 틈틈이 표류 경험을 정리해 표해록을 저술했다. 그는 32세가 되던 1775526일 문과에 27위로 급제했다.

첫 과거를 본 지 5년 만의 급제였으니 늦은 것은 아니었다. 그는 이후 비록 작기는 하지만 대정현감, 강원도 흡곡현령 등의 벼슬을 했다.

조선의 과거는 공정한 응시 기회를 제공하기 위해 3년마다 정기적으로 식년시가 실시됐다.

또 국왕 즉위, 왕자 탄생, 왕비 책봉 등 국가적 경사가 있을 때 비정기적인 별시가 실시됐다. 식년시는 실시 시기가 공개돼 있어서 지방 유생들도 시험 기간에 맞춰 한양으로 올라와 공부하다가 응시할 수 있었다.

 

‘국조방목’의 1863년 제주 별시 기록. 장서각 소장.
‘국조방목’의 1863년 제주 별시 기록. 장서각 소장.

반면 비정기 시험은 갑자기 시행하는 경우가 많아서 한양에 거주하는 사람들이 응시하기 쉬워 급제 비율도 한양 거주자가 더 높았다.

지방보다 시험 정보를 비교적 쉽게 얻을 수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이렇게 제주도는 지역적으로 멀리 떨어져서 출세의 기회에서도 많이 소외됐다.

제주 도민들은 지역적 장애를 넘어서기 위해 쉬지 않고 도전했다.

이러한 도전은 상소라는 형태로 나타나기도 했다. 고종실록 20, 188320416일 기사를 보면 저희들이 사는 섬은 조선 팔도의 밖에 있어서 과거 시험으로 인재를 뽑을 때 특별히 구별해 시험을 실시하였는데 먼 곳에 있는 사람들을 돌봐주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1882년과 올해의 과거는 팔도에서만 천거하게 하고 제주는 제외됐습니다. 온 나라가 함께 기뻐하는 때를 당해 섬에서는 기회를 만나지 못해 한탄스럽습니다. 삼가 바라건대, 이번에 서울에 와 있는 제주 사람들에게 특별히 과거에 응시하게 해 팔도에서 천거된 유생들과 함께 시험볼 수 있도록 이끌어주기 바랍니다라는 상소가 보인다.

 

‘영조실록’의 양덕하 등 4인 급제 기록.
‘영조실록’의 양덕하 등 4인 급제 기록.

노력의 결과 급제자의 지역 불균형을 해소하고 지역 민심을 달래기 위해 제주인들만을 대상으로 제주 별시를 거행하곤 했다.

하나의 예로 1863년에 시행된 제주 별시를 보자. 이 시험에서 여산 송씨 송상순(宋祥淳, 18421921) 5명을 선발했다.

송상순은 이후 정의현감 등을 지냈다.

이렇게 해서 조선 후기 제주도에서 문과에 급제한 이들은 대부분 별시에서 급제했다.

다음은 조선 후기 제주지역에서 실시된 별시 문과와 급제자를 요약한 것이다.

 

1665(현종 6) 문영후(文榮後) 3

1680(숙종 6) 오식(吳湜) 3

1707(숙종 33) 정창선(鄭敞選) 3

1739(영조 15) 양덕하(梁德厦) 4

1764(영조 40) 김필형(金必衡) 3

1775(영조 51) 강봉서(姜鳳瑞) 3

1794(정조 18) 변경붕(邊景鵬) 7

 

우리나라에서 과거제도는 거의 천년이라는 장구한 세월 동안 시행됐다.

우리가 알고 있는 현대의 각종 고시는 과거 시험에 비하면 그 역사가 매우 짧다.

짧은 역사 속에서도 제주인들은 과거 도전의 역사를 기억하며 오늘도 치열한 삶을 살아가고 있다.


필자 양창진(梁彰珍)은…
▲1967년생
▲제주제일고등학교 졸업
▲제주대학교 사회교육과 졸업
▲한국학중앙연구원 한국학대학원 정치학 석사. 박사 졸업
▲한국학중앙연구원 수석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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